2025년 마지막, 사랑에 대한 인터뷰

by Glenn

Q 올해 무엇을 했나요

A 사랑


Q 어떤 사랑?

A 그걸 여기서 말하면 너를 죽여야 해


Q 너는 난데?

A 그렇군요


Q 그래서 뭘 했다고?

A 사랑해야 하는 것들을 사랑했어


Q 왜 사랑이라는 표현을 써, 쉬워서?

A 정확하진 않지만 상황과 감정을 감각하고 해석하며 번역한 의미에 가장 근접한 단어라서. 심지어 온통 사랑 사랑 사랑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매거진에 게재했어. 그러고 보니 사랑은 올해의 주제에 가깝군요. 대상은 분명했어. 사람이든 행위든. 하지만 자주 불안했지. 풍랑 위에서 빠져 죽지 않으려고 중심을 잡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순간들이 너무 많았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살의에 휘말리고 사무치는 좌절과 낙담 속에서 괴로워하고 상실과 결핍을 살갗으로 겪으며 울부짖고 쓰러지고 넘어지고 피나고 기절하고 분리되고 다시 찢어지고 부러지고 망가지고 흩어지고 쏟아지고 비명을 지르고 그러다 보니 사랑을 쓰기엔 종이가 젖거나 펜 끝이 젖거나 손이 떨리거나 앞이 캄캄할 때가 많았어. 도망친들 벗어날 수 없다는 세뇌에 묶여 자책과 죄책감의 날을 갈아 스스로를 베었어. 절멸의 피로감에 부서져야 잠들 자격을 얻는 것 같았어. 비교가 평화를 주진 않았어. 타인의 불행은 더 이상 긍정과 희망의 흥분으로 이어지지 않았어. 사랑뿐이었어. 동시대에 통하는 의미는 모르지만 내가 저 말을 적을 때 적어도 나는 저 의미를 이해하려 애썼어. 최소한 오해나 의심을 거두려 했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또 모르지, 불행의 타이밍은 가장 똑똑하고 악랄하게 찾아오니까.

(intermission)


Q 언제가 제일 힘들었어?

A 한번 한순간은 아니야.

여전한 부분은 있지만 나아진 부분도 많아


Q 모호하구나

A 의견을 단정하는 순간

반박하는 경우가 바로 생기기도 하니까.


Q 오해받는 게 그렇게 싫은가

A 몇 개의 옵션을 정해두고

기민하게 반응하고 싶은 것


Q 언제 생각이 제일 많아졌어

A 혼자 걸을 때 주로 점심과 저녁, 오전과 오후


Q 그게 뭐야. 전부 다잖아

A 늘 생각이 많았어


Q 사랑을 생각하는 거야, 생각을 사랑하는 거야

A 둘 다, 하지만 전자가 더 좋아


Q 특이했던 경험?

A 새로 출시된 프라다 핸드크림을

그 향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Q 그 향의 정체는?

A 프라다 레 인퓨전 드 아이리스


Q 또 다른 특이했던 경험은?

A 며칠 전 발레 공연을 처음 봤을 때

와이즈발레단 전막발레 ‘호두까기인형’


Q 올해의 뮤지션과 자주 들은 곡은?

A 곽진언, 비밀, 그대의 것,

더 멋진, 어쩔 수 없는 일 등

25년 12월에만 애플뮤직 기준 3,500분 이상


Q 올해의 클래식은?

A 체코 필하모닉 & 세미온 비치코프

Smetana: Má Vlast 앨범 II. Vltava

(작곡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Q 올해의 책은

A 김지수 작가와 진은숙 작곡가

인터뷰가 실린 '의젓한 사람들' 그 외 다수


Q 올해의 영화

A HBO 유포리아


Q 아니 영화라고

A 더 파더 (올리비아 콜먼)


Q 이런 QA를 며칠에 걸쳐 왜 하는 거야

A 정신상태 체크


(intermission)


Q 죽고 싶던 적은?

A 자주


Q 언제

A 행복이란 단어가 여전히 쓰기 어색한데


Q 언제냐고

A 내가 잔이라면 행복이

그득 넘치고 있다고 여겨졌을 때


Q 고통과 분노가 아니라

A 너무 좋으면 지나간 후가 두렵거든.

29일 불행하다가 39초 정도 행복할 수 있는데

그게 반복되는 게 매우 난감한 거야.

밀물과 썰물처럼. 밀물이 썰물이 될 때

너무 많은 모래를 다 가져가는 셈이지

등가라고 하기엔 대가를 치르는 기간이 너무 길어

그래서 언제 지나가나 끝나나 이러다가

예고 없이 벼락같은 행복, 희열, 감격이

와르르 쏟아져 내릴 때 너무 좋은데 너무

공포스럽게 되는 거야. 그래서 차라리

여기서 이만 생물학적 삶을 멈추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어.


Q 그래서?

A 죽지 않았지만 언제 어떻게든

다시 찾아올 수 있는 상태 같은 거지.

자살 충동 같은 건. 예방하려면 모든 인물과

상황에 대한 통제권과 판단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신에게라도 있었다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아이들을 그렇게

죽일 수 없었겠지. 능력을 벗어난 일이야.

벗어날 수 있는 시도는 늘 필요하고.


Q 내년 계획은?

A 새로운 건 없어


Q 안 새로운 건?

A 애써 끌어안고 있는 사랑을 놓지 않는 것.

모든 에너지를 거기에 쏟는 것. 이를 위해서

나를 지켜내는 것. 지식과 음악과 책과 영화를

쉼 없이 섭취하며 뇌와 눈과 정신을 씻어내는 것

용서하는 법을 더 연습하는 것.


Q 남은 말은?

A ‘읽지 않음’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Q 누구한테 하는 인사야?

A 나도 몰라


Q 올해 단 하나의 문장은?

A 깊은 밤은 그대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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