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염되었어. 만약에 우리

김보영 감독. 만약에 우리

by Glenn

나는 오염되었어. 너희들의 이런 사랑이 우습고 가엾게 보일 정도로. 너희들의 궁핍한 과거가 이별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위한 핑계로 보일 정도로. 내겐 오랜 고정관념이 있어. 세상에 어떤 두 사람(성인)이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두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떤 과정과 결과를 마주했다면 두 사람에겐 그게 전부라고. 그걸 능력이나 한계이든 불러야 한다면 그만큼의 능력이자 한계라고.


심장을 떼어준다고 키스할 때는 좋았는데. 폭우를 맞으며 뛰어간 후 막상 망설여지는 건 생존본능이 순간 위험신호를 보낸 거였겠지. 이 여자(문가영)와 다시 관계를 이어나가면 더 나아질 확률이 매주 낮다고. 그걸 감당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고난이 뒤따를 지도 모른다고. 너(구교환)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고. 더 싸우고 더 미워하고 싫어하고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 스스로를 원망하게 혐오하게 될 거라고. 위험한 우리가 아니라 비겁한 줄 알면서도 생존을 선택한 거지. 심장 떼어준다는 약속은 기억이나 났을까.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경제적인 안정은 너무 중요하지. 하지만 거기에 사랑이 융합되면 더 복잡한 맥락과 선택을 해야 하잖아.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게 되지. 무엇이 더 먼저인지. 아빠 병원비인지, 여자친구 학자금인지. 나 그때 너 정말 많이 사랑했다... 같은 말은 자기 자신을 위한 독백이라는 걸 모를 리 없으면서도. 굳이 꺼내어서 칭찬받고 싶어 하지. 널 위해 보이지 않는 정성을 쏟으며 최선을 다했다고. 최선 최선 최선... 정말 다했다면 그때 멈추지 않았어야 했을 텐데. 그 절박한 순간에 선택한 게 겨우 자기 자신이라는 게 얼마나 오랜 시간 부끄러웠을까. 다른 인간들은 그토록 여유롭고 행복이 쉬워 보이던데 내 인생만 이렇게 컬러가 아닐까. 멀리서 식당이라도 하고 있는 아버지를 둔 인간이 보육원에서 자란 여자친구의 심정을 헤아린 적은 있었을까. 그런 적이 있었는데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건 최선을 다했든 안 했든 거기까지라는 것. 만약이든 뭐든 우리가 아닌 나를 선택했잖아. 다시 만나 엉엉 울면 뭐 해... 전화기 속에서 애기가 아빠아빠거리고 있는데.


가난은 포장이 쉽지. 유사 경험한 이들에게 설명하기 쉬우니까. 가난한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긴 한데, 가난하지 않다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냐. 가난하지 않고 아름다운 세계는 오히려 더 아름답고 격정적이고 애틋할 수 있어. 순수한 감정에 집중하며 사랑의 대상으로서 서로를 온전히 아끼고 느낄 수도 있어. 망설이지 않고 주고 싶은 것을 선사하고 더 사랑스러운 경험을 만끽할 수도 있어. 가난이 삐걱거리는 관계의 핑계가 될 때 당사자는 알고 있겠지. 자신에게 진짜 없는 건 돈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렇게 흠뻑 젖은 불행은 결국 스스로 선택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출처 없는 통계에 기대고 싶겠지. 가난한 커플이 더 헤어지기 쉽다고 어쩌고. 있는 애들은 무례하고 없는 애들은 분수를 안다고. 다들 자기 방의 창문 사이즈만큼 하늘을 보기 마련이니까. 먹고사는 거 어렵지. 그게 이유로 헤어졌다면 거기까지겠지. 물론 심장은 무사히 지켰을 테고. 나는 오염되었어. 너희들의 이런 사랑이 우습고 가엾게 보일 정도로.



P.S

"인연이란 게 끝까지 잘되면 좋겠지만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는 게 쉽지 않지."

5년 전 '먼 훗날 우리' 리뷰

https://brunch.co.kr/@sk027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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