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긴 글을 쓰고 있어
3만 자 정도의 초안을 정리 중인데
기존 기록들을 우연히 보니
이런 글을 오래전부터 쓰고 싶어 했더라
쓰고 나니 과정에 집착하고
문장을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에피소드를 붙이고 붙이고 붙이고
캐릭터를 더하고 지우고 지우고 지우고
배경과 설정을 뒤집고 수정하고 다시 쓰고
소심한 농부가 되어 젖은 땅에 씨를 뿌리면
고장 난 트랙터가 되어 모든 흙을 다 파해쳐
거대한 절구가 되어 뿌린 씨를 다 으깨어
으깨진 가루를 모아 우유를 가득 붓고
-18도에 냉동 보관 열두 시간 뒤
한 조각씩 에스프레소 180ml에 넣어
표면의 크레마와 컬러의 변화를 보며
촉촉한 입가를 문질러
잔의 바닥에 남은 가루를 찍어
비닐을 막 뜯은 원고지에 편지를 써
받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반송할 사람도 없는
분명 쓰였지만 절대 공개되지 않을
내 맘에 완전히 들 때까지 그렇게 하고 싶은
이런 이유로 영영 수정만 하다가
녹슨 사슬에 감겨 수장될 위협에 내내 몰린
웃기게 생겼는데 가엾기도 한
그래서 고치는데 더 일그러지는
화염 속의 이미 재
파쇄되는 모험들
달리지만 결승선이 없고
늦었지만 어차피 최초의 장르
기계가 사람을 죽이고
먼저 사람들은 스스로 죽였고
모두가 연극의 정체를 모른 척하고
피 한 방울 없이 세계가 멸망하는
경계 없이 모두를 휩쓰는
차갑고 다정한 아마겟돈
예언은 없었지만 적그리스도가 나오고
균열을 가공해서 뉴 노멀을 창조해
거짓말의 끝을 거짓말을
처음 시작한 주체도 모르고
게다가 편지라니
누군가 배신을 하니까
누군가 배신을 당하는 세계
이런 글을 쓰고 있어요 요즘
사랑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