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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Sep 12. 2017

블리드 포 디스, 어떤 사랑은 소리가 없다

벤 영거 감독. 블리드 포 디스








포기하라고 

넌 이제 끝이라고

더 이상 링 위에 오를 수 없다고

인생의 다른 방향을 선택해보라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미친 짓이라고

쉽지 않다고

쉽지 않다고

쉽지 않다는 말은 

얼마나 경박한가. 

의지를 꺾는 말들이 

위로를 위장한 채 비니의 머리 위로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통산 전적 60전 50승(30KO) 10패. 

전 미국이 주목하고 있는 비니 파지엔자(마일즈 텔러)의 복귀전이자 

파나마의 돌주먹 로베르토 두란과의 챔피언 결정전. 


장내와 TV 앞에 모인 모두가 주먹을 꽉 쥐고 있을 때 

부릅뜬 눈으로 안달하거나 터져 나오는 환호성을 못 참고 있을 때 

유일하게 침묵하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루이스(케이티 사갈). 

비니 파지엔자의 엄마


늘 그랬다. 

상처투성이인 아들 얼굴을 보면서도 

권투를 그만두라고 말린 적은 없었다. 

심지어 교통사고로 인해 비니의 재기불능 선고가 내려진 후에도

생명을 위협할지 모를 재활에 목숨을 건 아들의 분투를 보면서도

그녀는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목소리를 잃은 사람처럼, 차마 낼 수조차 없다는 듯

그녀 주변은 늘 옅고 불안한 침묵이 맴돌고 있었다. 


부러진 목뼈를 고정시키기 위해

머리와 어깨에 철골 구조물을 달고 이마에 나사를 조인

비니 파지엔자보다 표정과 눈빛만으로 어쩌지 못하는 

그녀가 더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고 

걱정의 크기를 드러내지 않았고

제발 조심해달라고 재차 당부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음으로 

어떤 목소리보다 더 크게

어떤 펀치보다 더 강렬하게

어떤 환호보다 더 열광적으로

비니의 곁을 호위했다. 


경기가 펼쳐질 때마다 등 돌리고 있었다. 

집안의 모든 가족들이 비니의 승리를 응원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돌린 마르고 가녀린 등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게 비니의 엄마, 루이스의 방식이었다. 


링 위에선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철저히 혼자였지만

챔피언이란 자리엔 혼자 오르는 게 아니었다.

비니의 주변엔 늘 자신보다 더 열렬하게 밀어주는 아버지(시아란 힌즈)와 

비니의 인생을 바꿔준 결정적 트레이닝을 해준 케빈 루니(아론 에크하트)가 있었다.

그의 흥망성쇠를 앞다투어 보도하는 카메라와 마이크를 든 기자들이 있었고

그의 정신과 신체가 어떤 상태든 곁을 떠나지 않는 여자 친구도 있었다. 

챔피언 비니 파지엔자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블러디 포 디스는 

이 많은 주변인들의 시선을 고르게 분포한다. 


코치 케빈이 불과 물처럼 비니의 근육과 투지를 뒤흔들었다면

엄마 루이스는 넓고 포근하고도 견고한 온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난타당한 비니의 얼굴이 헛되이 흘린 피로 끝나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었다. 

어떤 사랑은 소리 내어 이야기되지 않는다. 

어떤 승리의 역사는 깊고 무거운 침묵을 통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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