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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Oct 17. 2017

빌리 진 킹,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

발레리 페리스, 조나단 데이턴 감독.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경기를 끝낸 후

라커룸에 홀로 앉은 빌리(엠마 스톤)는

벅차오르는 눈물과

비집고 나오는 울음을 틀어막으며

오열한다.


세기의 테니스 대결

전미 대륙의 여성들을 자극하며 공분을 사게 했던

과거의 챔피언 바비(스티브 카렐)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준 후였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오랫동안 끌어왔던 피로한 싸움.

선수 개인의 명예와 자존심을 건 경기를 넘어

여성이라는 인간의 권리와 처우에 대한

양상을 바꿔놓을 정치성이 짙은 대전이었다.

지는 쪽은 많은 것을 잃고 말게 될.

부담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정은 열악했고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겼다.


사면으로 좁혀오며 갈등을 부추기는 미디어

동네 불구경하듯 낄낄대는 남자들

생사여부라도 걸려 있는 듯

비장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여자들.

만인의 관심에 둘러싸인 채 엄청난 압박을 넘어

단 한 세트도 공공의 적에게 내어주지 않는다.


바비는 세상을 잃은 표정으로

어깨와 눈가를 늘어뜨렸고

여성을 흥미로운 소모품으로 보았을 뿐,

동등한 지위의 대결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던

남자들은 입을 다문다.


경기를 마친 후 환호 속에서

선수로서의 수고를 인정하며 빌리와 바비는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고

각자의 라커룸으로 돌아와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경기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몸으로

누구의 출입도 제한된 공간에서

역사적 승리를 거둔 챔피언 빌리는

오열하고 있었다.


한없이 익숙하고 편안한 남편(오스틴 스토웰)

위험하고 불안하지만 처음 마주치는 순간

마침내 발견한 듯한 진정한 사랑,

마릴린(안드레아 라이즈보로)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성별을

대표해 싸워 승리했음에도

빌리의 기쁨은 100%가 아니었다.


빌리는 경기 전부터

세상이 만든 편견과 시선을 상대로

패배하고 있었고, 재기할 수 있는 전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면한 경기에서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 승리가 온전히 자신의 생을 한발 더

나아가게 해 주지는 못할 거 같았다.


늦게 만난 사랑, 늦게 만난 여자,

마릴린과 함께할 수 없다면.

빌리의 삶은 영원한 패배와 마찬가지였으리라.


울음을 그친 들 뭐가 달라질까.

모두가 기대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삶이

개인의 욕망과 철저히 대치하고 있었고

한쪽을  명확히 선택하지 않는 한

변화도 개선도 희망도, 더 이상의 웃음도 없었다.


1973년 9천만 명을 열광시킨 성대결 실화.

숨겨진 단면에 빌리 진 킹 개인의 삶이 있었다.

다시 선택한 사랑이 있었으며 그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세기의 대결은 여성 인권의 지위를 상향시킨

성과만 거둔 것이 아니었다.

빌리는 코트 밖의 세상과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쟁취했다.

마릴린을 바라보던 빌리의

넋을 잃은 표정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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