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생각을 만드는지
생각 이후에 단어가 오는지
경험은 어디쯤 위치하는지
고통과 슬픔이 누울 곳은 어디인지
줄을 세우려다가 그만두었다.
완전한 침묵만큼이나
꽉 채워진 시끄러움도 없을 텐데
아직도 여전히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아무리 팔뚝을 어깨까지 쑤셔 넣어 휘저어봐도
가라앉은 뭔가를 건질 기미가 없다.
잃어버린 자가 잃어버린 뭔가를 찾다가
몸통 전체가 빠져들어가 창자가 순대처럼
뭔가의 뭔가로 자욱하게 목구멍까지
채워져 헐떡거리며 채워져 숨이 막히게
말이 막히게 바둥바둥
119를 부르고 싶어도 팔 닿는 곳에
전화기가 없고 번호도 잊어버린 낮.
오래전 돌돌 풀어놓은 색연필로
시험지에 긋는다. 숫자를 적는다.
의견을 덧붙인다. 너무 많은 의견들, 변명들,
사적인 이야기들.
빨간 줄이 너무 많아 흠뻑 젖었다.
꽉 짜내어 시험지 내용을 확인한다.
이해할 수 없는 질문들과 텅 빈 답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
아무것도 쓰지 않았으니까.
쓸 수 없었으니까.
시험장에 잘못 찾아왔으니까.
시험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전공과 과목과 수업을 잘못 선택했다.
라고 변명하려다 시험감독관에게
귀싸대기 처맞고 고막 터졌다.
저기 너 피가 줄줄 새.
눈탱이를 처맞고 앞이 안 보여.
저기 너 병원에 가야 할 거 같아.
아무도 없어.
전화기도 잃어버렸고
구급차를 불러 줄 사람도 없어.
때린 사람도 없고
맞은 자국도 없어.
야 너 피난다고.
이거 피 아니야. 시험지야. 색연필이야.
미친 새끼가 말을 못 알아 쳐 먹네.
니 손이 다 핏물인데 뭔 개소리야.
어?
앰뷸런스 좀 불러줘요...
나가.
여기서 나가.
문이 없어.
그럼 창문으로 나가.
거기로 나가면 죽어.
안 죽어. 여기 지하야.
지하?
여기 무덤이야. 너는 이미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