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워리, 아무도 원하지 않았는데 태어난 사람

구스 반 산트 감독. 돈 워리

by 백승권

타인의 절망은 자주 희망이 된다. 난 저 정도는 아니지. 이상하지만 반사적인 위안을 얻는다. 당신의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공감합니다.라는 태도로 위장하기도 하지만, 같은 맥락과 상황의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아니라면 가능할 리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존 캘러핸(호아킨 피닉스)은 평생 휠체어 선고를 받는다. 술 먹고 차사고 났다. 같이 술 마신 운전자는 멀쩡했고 동승했던 존의 인생은 영원히 직립할 길이 없었다. 휠체어 상태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건 희망이 아니라 술병이었다. 존은 몸이 쓰러질지 언정 술을 위장에 24시간 들이부어야 하는 중독자였다. 사고 이후 달라진 건 서서 술 마시던 존이 앉아서 술 마시는 존이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존은 우연히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존의 사연을 듣던 옆사람이 웃는다. 존은 발끈한다. 나는 엄마가 원하지 않은 아이로 태어나 버림받고 내내 따돌림당하다가 10대 때부터 술에 의지해 이렇게 처참한 사고까지 당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이렇게 가슴 찢어지고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고 웃어?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 중에서 자기 연민은 독이었다. 웃었던 사람은 생사를 오가는 심장질환을 겪고 있는 사람이었다. 존은 숙연해진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줄 알았지.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각자 인생 어디 한구석 고장 났다고 스스로 판단한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존은 회복의 단계를 밟아나간다. 술병을 여전히 놓지 못한 채.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자라는 결핍은 평생 괴롭힌다. 지독하게 어미를 증오하고 그리워하던 존은 환영을 본다. 엄마의 손자국이 존의 등을 어루만진다. 그전까지 멀리 죽음이 휠체어와 오줌주머니에 의지한 자신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존은 술을 멀리하기로 한다. 좋아하는 여자 아누(루니 마라)와 재회한다. 건강한 삶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노력이란 걸 한다. 상반신으로 할 수 있는 것들 중 카툰이라는 재능을 발굴한다. 인물과 상황을 다룬 한 장면을 펜으로 드로잉하고 위트와 시대를 읽는 관점이 녹아든 대사나 문구를 삽입한다. 화려한 채색은 없어도 신문이나 잡지를 펼치는 누군가를 씩 웃으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콘텐츠. 존은 이렇게 자신이 살아나고 있음을 세상에 알린다.


어린아이처럼 들떠하며 지나는 곳의 모두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알린다. 코고 작은 강연도 맡게 된다. 존은 어느새 다치기 전보다 훨씬 나은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고 작은 재능을 다듬어 시장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중독 치유 단계의 막바지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자신이 상처 준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그들은 대부분 존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중에는 사고 당시 운전자였던 덱스터(잭 블랙)도 있었다. 당시 덱스터가 운전하던 차가 판단 착오로 들이받아 이 지경이 된 거였다. 덱스터는 이후 행방을 감췄고 존은 찾지 않았다. 존은 삶을 달관한 표정으로 덱스터를 찾아가 포옹한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던 덱스터는 존에게서 시련을 스스로 돌파한 자의 광채를 목격한다. 존은 자신을 버린, 여전히 찾지 못한 엄마까지 용서하기로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존은 자신을 향한 오랜 증오도 같이 내려놓는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으며 알코올 중독에 빠진 자의 해피엔딩은 시시하다. 물론 스스로를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기며 이야기가 끝나는 걸 바란 것도 아니다. 존의 이야기를 보며 느낀 건, 그래 다들 각각 불행하구나.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살든 3대째 막대한 부를 누리며 살든, 깊게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들 절망 하나쯤은 뒤엉켜서 지내는구나 싶었다. 불행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을 괴롭히거나 덜 불행한 사람이 더 불행한 사람에게 인생을 가르치려 들거나. 극적인 클라이맥스 없이, 인생은 대부분 예측 가능한 운명들로 들끓는 도가니처럼 보였다. 존의 자기 연민 배경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헤어 나오기 힘든 고통이라 여겨졌는데, 간절함이 투영된 엄마의 환영을 본 후 태도가 바뀌었다는 건 너무 동화 같았다. 실제 인물이 소재라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결국 존을 바꾼 건 존의 지독한 자기 연민이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그렇게 그립던 엄마를 환상으로라도 보고 난 뒤 존의 결핍은 치유의 과정으로 돌아설 수 있게 되었다. 그리워하지 않았다면 보였을 리 없다. 존을 이끈 건 존 자체였다. 버리고 도망간 엄마가 아닌.


타인의 절망은 자주 희망이 된다. 절망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아닌 희망을 붙잡으려고 아등바등 거리는 모습을 영화로 마주할 때 그제야 난 절망이 가르쳐주는 것들을 메모하게 된다. 난 같은 상황에서 절대 저럴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존에게서는 배울 게 없었다. 절망 속에서도 술병을 끌어안으며 더 깊은 절망을 갈구하는 했던 이가 자신과 세상을 비웃는 방식으로 카툰을 시작했을 때 잠시 반짝였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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