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서랍 속의 기억

어제 일도 기억이 안나는 나이. 하지만 잊히지 않는오래 전 기억들.

by 꿈꾸는 로사

방금 채널 11 문화방송에서 <요술 천사 꽃분이>가 끝났다

아랫목에서부터 무릎만 세운 채 엉금엉금 기어가 채널 7번 TBC로 돌리고 다시 엉금엉금 아랫목으로 쏙 돌아와 방금 시작 한 <이겨라 승리호>를 본다.

엄마가 시장 다녀오셨나 보다. 대문 닫는 소리가 들리네.

해 넘어가는 이 시간에 우리 집에서 제일 바쁜 사람은 아마 엄마가 아닐까 싶어.


널찍한 냄비에 담겨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는 찌개 냄새가 코를 간지럽혀..

안방 윗목에는 엄마가 개켜놓은 빨래들이 차곡차곡 쌓여있고 책상보다는 TV 앞에서 배 깔고 엎드려하는 숙제가 편했는지 방바닥 여기저기에는 지우개 가루와 샤프심이 뒹굴어 댕기곤 했어.

삼 남매는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턱을 괸 채 만화영화를 보다가 만화가 끝나는 딱 그 시간에 띵똥~초인종 소리가 나면서 아빠가 퇴근하고 오신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어.

오늘은 은박 포일에 싸인 <켄터키 치킨>을 사 오셨을까?

아님 <투게더>를 사 오셨을까?

오늘은 닭다리도 아이스크림도 아니었지만

퇴근하신 아빠 손엔 한 달 내내 기다렸던 <소년중앙> <새 소년><어깨동무> 잡지 세 권이 들려 있어.

본책보다는 매 달 새로운 장난감이나 학용품으로 우리를 현혹시켰던 특별부록을 서로 먼저 갖겠다고 다투다 결국 잡지와 부록 모두 엄마께 압수당하고 말아.

삼 남매는 서로에게 눈을 흘기며 투덜대다 퉁퉁 부어 입이 나온 채로 저녁 밥상에 둘러앉곤 했어.

맛있는 반찬 좋아하는 반찬들은 서로 자기 앞으로 당겨놓고 다 먹지도 못할걸 욕심만 부려.

숟가락만 입에 물고 밥은 안 먹고 종알 종알 떠들다가 결국은 엄마가 한대 쥐어박으면 그제야

눈물 반수저에 밥을 말아먹기도 했어.


그때는 어렸으니까 어른이 아니었으니까.. 참 순진했나 봐.

TV에서 9시 시보가 울리면 잠옷을 입고 이불을 펴는 삽화에 졸음을 부르는 성우의 목소리로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라는 멘트가 흘러나왔거든.

그럼 하늘이 두쪽 나도 잠이 오든 안 오든 TV 속 예쁜 잠옷까진 아니더라도 내복 바람에 이불속으로 들어가야 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어. 엄마 말은 징그럽게 안 들으면서 얼굴도 모르는 TV 속 아줌마 멘트에는 잘도 속았던 거지.

어쨌든 낮에 엄마한테 거짓말도 하고 동생과도 싸웠지만 9시에만 자면 착한 어린이가 될 수 있다니 9시 땡 하면 꿈나라로 갔던 거 같아.



그때는 어쩜 그렇게도 씻는 것도 귀찮고 싫었는지.

마지못해 고양이 세수를 하고 책상 위에 붙어 있는 시간표대로 책가방을 챙겨놓고

엄마가 불을 꺼주고 나가시면 지난 토요일 낮에 재방송으로 봤던 <전설의 고향>중 가장 섬칫한

장면만 떠오르곤 했어.

행여 동생이 먼저 잠들고 혼자만 깨어있을까 두려운 마음에 내가 먼저 잠들려고 바둥거리다 스르르 잠이 들곤 했지.

하루 종일 놀 때는 한 번도 생각 안 나다가 불을 끄고 잠자리에만 누우면

눈알이 빨간 구미호가 내 옆에 같이 누워있는 것만 같은 그 소름 끼치는 느낌은 뭐였을까?


지금은 <킹덤>도 시시해서 보기 싫은 어른이 됐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살지만 별로 무섭지도 않아.

티격태격할 형제도 없고 투정 부릴 부모님도 안 계신 지금, 어제 일도 깜빡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 시절 그 기억들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또렷해.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기억들이라 생생한가 봐.


여름이 그림자만 남겨둔 채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며 비를 뿌리는 저녁.

문득... 평범했던 그 저녁 풍경이 많이 그리워지는 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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