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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떼구르르꺄르르 Apr 26. 2022

내향인으로서 2차는 인정할 수 없어

회식 시대의 재림, 내향인의 2차를 즐기다

단체 회식이란 것이 부활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 술을 핑계로 속 마음을 드러내는 척해야 하는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너무나도 오랜만인 회식이라 다 같이 내일 일하는 시간에 숙취라는 명분을 공식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날이라서 마음 놓고 술을 마실수 있다는 기쁨을 정말 잠시 느꼈다.


알코올 연비가 너무나도 좋은 나는 소주 세 잔에 이미 발그레를 넘어선 불그레가 되었다. 알코올을 분해하는 효소를 유전받지 못한 숙명이다. 남들이 멀쩡할 때 같이 세네 잔을 연거푸 마시고, 누가 봐도 취한 사람처럼 붉어진 얼굴을 핑계로 그 뒤론 잔을 좀체 비우지 않는다. 적당히 취한 채로 잘 모르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적당히 맞장구쳐 주다 보면 슬슬 머리를 드는 생각이 있다.


'집에 가고 싶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바쁘다. 자세히 들어보면 빈 껍데기뿐인 상호작용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관자적 입장에서 그럭저럭 들어줄 만하다. 적어도 오후 8시까지는 그렇다.


그 이후로는 내향인의 사회적 에너지가 술기운과 함께 달아나버린다. 술맛과 온도, 음료수 맛도 그저 밍밍하다. 어떻게 중간에 빠질 수 있을까를 겉으로 농담들에 웃고 손뼉 쳐주며 멀티태스킹 한다.


오늘은 다행히도 2차 가는 길에 스리슬쩍 빠져나와 산책하며 속을 달래고 있다.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는 소주 반 병 맥주 반 병에 어울리지 않다. 그렇지만 이미 취한, 나와 적당히 친하지도 친하지 않기도 한 사람들에겐 내가 속이 좋든 안 좋든 무슨 상관 이리오.


적당히 중간에서 빠져나와 조용한 길을 걷고 있다. 이 길 근처에는 향기로운 꽃향기가 나고 물소리도 들린다. 사람도 차도 다니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 같은 내향인에겐 2차보다 이게 어울린다. 비 온 다음 봄날이라 그런지, 정말로 향기로운 냄새가 숲 속에서 진하게 풍겨온다. 무슨 나무에서 나는 향인지 알아낸다면 향수로 매일매일 내가 지내는 공간 모두에 뿌려대고 싶다. 꽃냄새 같기도, 흙냄새 같기도, 나무 향기 같기도 한 이 냄새. 나의 2차로서 정말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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