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의 부모에 대한 언급 부분이 꽤 구체적이네요.” 소설의 내용을 들려주던 중 사장이 끼어들었다.
“그게… 사실은 부모에 대한 설명이 원래도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은이의 부모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썼던가?
“그럼 지금 소설을 새로 쓰고 있는 중인 건가요?”
“새로 쓰고 있다기보다는… 그때 생략했던 내용을 조금씩 덧붙인달까요?”
“좋아요, 그쪽이 더 재미있어요. 그래도 궁금하긴 하네요. 당시에는 생략했던 은이의 부모에 대한 설명을 지금 와서 추가하고 있는 이유가요.”
“그게 꼭 필요한 내용은 아니었을 텐데, 흠, 저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생각을 좀 해봐야겠는데요.” 우리는 잠시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침묵을 깬 건 카페 사장이었다.
“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
“아무래도 그런 이유겠죠.”
“생각했던 것 보다도 은이는 작가와 더 많이 닮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카페 사장이 시선을 떨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 했으나 사장은 이내 고개를 들더니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3인칭이지만 어쨌든 화자는 은이잖아요. 그렇죠? 다른 누구보다도 은이는 작가의 현실이 반영된 캐릭터 같아요.”
“그래요?”
“네, 들을수록 제 앞에 계신 분과 닮았네요. 그냥 본인처럼 느껴질 정도로.” 사장이 미소를 지었다.
“흠. 꼭 그렇지는 않아요. 은이는 제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을 해내거든요.”
“그게 뭔데요?”
“파리의 한인 게스트하우스에서 직원으로 일 년 간 일하기?”
“앞으로 이어질 얘기예요?”
“네. 그런데 딱히 대단한 내용은 없어요. 한국으로 돌아가기는 싫지만 체류할 돈이 없으니 자신이 묵던 게스트하우스의 한인 사장에게 물어보거든요. 혹시 여기서 청소와 설거지, 조식 준비와 빨래 등등을 하며 장기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겠느냐고요. 혼자 일하는 것이 힘들었던 게스트하우스의 사장이 제안을 받아들이죠. 그렇게 은이는 게스트하우스의 신데렐라가 되어 일 년을 거기서 일해요.”
“본인이 그렇게 해보고 싶었어요?”
“음… 소설에서는 은이가 일을 해도 되겠느냐고 먼저 제안을 하지만 저는 반대로 제안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제가 묵던 게스트하우스의 사장이 여기서 일해볼 생각 없느냐고 물었거든요. 비자 문제도 까다롭고 해서 저는 거절했었어요. 자신이 신원 보증과 비자연장 비용도 대주겠다고 했는데도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조금 아쉽기는 해요.”
“은이는 그 모든 어려움을 뚫고 일 년간 그곳에서 일했다는 설정?”
“네네, 소설적 허용.”
“게스트 하우스 사장이 은이를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어 한 이유가 뭘까요?”
“흠… 게스트하우스 사장이 은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역시 한국에서 도망치듯 프랑스로 왔고, 프랑스 남자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에 위자료로 받은 낡은 건물을 이용해 주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게스트하우스를 하며 살아가는, 뭐 그런 사연을 가진 사람이거든요. 혼자 고군분투하다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난 것이죠. 제일 중요한 것은 숙소와 밥만 제공하면 하루 24시간 부릴 수 있는 노예가 생겼으니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겠고요.”
“그것도 실제와 비슷한 것이겠죠?”
“아뇨. 실제로 제게 제안을 한 분은 소설과 달리 남자분이었고,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고, 가족과 함께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었고, 유학원을 차릴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일할 사람도 마음만 먹으면 현지에서 구할 수 있었겠지만 그분은 제가 과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아요. 별일이 다 일어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직원의 과묵함은 정말 중요한 덕목이니까요.”
카페 사장은 으흠, 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과묵이라… 나는 그대가 과묵하지 않고, 나랑 취향이 비슷해서 좋다오.”
“저도 그래요.” 내가 입모양으로 대답하자 카페 사장이 웃었다.
“하여튼, 은이의 파리 생활이 꽤나 궁금한데요?”
“아, 별거 없어요. 돈이 없으니까 뭐 어디 대단한 곳으로 다니지도 못하고, 꽤나 고된 노동을 하게 되거든요.”
“악덕 사장이었어요?”
“악덕까지는 아닌데, 은이는 사장 손바닥 안에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그러니 사장은 점점 더 많은 일을 떠맡기더니 결국 게스트하우스의 운영을 맡겨버리다시피 하고는 본인은 신나게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었죠. 일에 허덕이던 은이는 일 년 만에 도망치게 되고요.”
“저런.”
“은이는 게스트하우스에 갇히다시피 해서 종일 청소를 하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뭐 그러며 지내요. 유일한 낙은 마트에 장 보러 가서 저렴한 와인을 사다 마시는 것 정도랄까요? 그러면서 게스트하우스 손님들과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게 되고요.”
“비자 연장하려면 어학원에 다녀야 되지 않아요?”
“네, 거기도 다니고. 하지만 즐겁지는 않아요. 할 일이 쌓여 있어서 끝나자마자 돌아와야 했거든요. 가끔 여유가 생기면 걸어갈 수 있는 공원에 가서 책을 읽는 정도였어요. 그런 식으로 일 년이 흐르죠.”
“왜 그런 설정을 넣었어요?”
“그런 설정이요?”
“파리에서 일 년 간 체류하며 게스트하우스의 노예로 사는 설정?”
“음… 제가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어차피 제안을 받아들였어도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는 식으로 후회와 미련을 누르는 게 아닐까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에 나는 대충 대답했다. 대답하고 나니 스스로도 꽤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카페 사장은 대답이 충분치 않은 듯 턱을 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가 왜 이 부분에 집착하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이 부분이 영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그대는 나와 이 카페에서 일하는 게 정말 즐거운 거죠? 저는 악덕 사장 아니죠?”
“악덕 사장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이 카페는 제게 구원에 가까운 걸요!” 나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진심으로 말했다.
“다행이에요. 은이도 그런 곳에 갔으면 좋았으련만.” 사장이 딱하다는 듯 말했고,
“어쩌겠어요. 작가가 못됐죠” 나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네요. 못됐네.” 사장이 웃으며 맞장구쳤다.
실은 은이의 부모에 대한 설명 말고도 파리에 일 년 간 체류하는 내용 자체가 이전에 쓴 것인지 아니면 지금에 와서 덧붙이게 된 것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은 사장에게 끝까지 하지 않았다. 사장과 대화하면서 가끔씩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 자신도 아직 잘 모르는 소설의 이야기에 대해 사장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알 게 뭐란 말인가? 어차피 이렇게든 저렇게든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