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는 일 년 간 파리에 체류한 끝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떠나기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은 와인을 너무 마셔서 지쳐버린 간과 착색된 이, 그리고 트렁크를 채운 몇 병의 프랑스 와인과 치즈가 전부였다.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 게스트하우스의 사장은 은이를 붙잡기 위해 뒤늦게 이런저런 ‘직원 복지’의 청사진을 제공했다. 일주일에 이틀은 쉬게 해 주겠다라든가, 용돈 정도에 불과한 월급을 더 올려주겠다는 식의 제안이었다. 은이는 고개를 저었다. 은이는 사장에게 불만이 없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못해먹을 정도는 아니었고,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쉬는 날 잠시 근교에 다녀온 적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찾아온 자신을 믿고 비자 연장까지 적극적으로 알아봐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다른 것들을 압도할 정도로 컸기 때문이다. 어학원에 다녔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게스트하우스에서 한국어를 쓰며 보냈기 때문에 프랑스어 실력이 크게 늘지 않았다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떠나기 전날 밤 게스트하우스 사장이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은이의 트렁크에 밀어 넣은 와인은 꽤 비싼 종류의 것이었다. 은이는 트렁크에서 병을 꺼내 들고 사장에게 함께 마시자고 했다. 사장은 그 와인 말고 자신이 아껴둔 와인을 마시자고 했고, 은이는 흔쾌히 동의했다. 마지막 날만큼은 은이를 귀한 손님 대하듯 했고, 은이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움을 느꼈다.
“한국에 돌아가면 뭐 할 거야?” 게스트하우스 사장이 물었다.
“다시 일을 구하겠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프랑스에서 일 년이나 지냈는데 관광도 제대로 못했지? 이틀 정도 더 있다가 가면 내가 관광도 시켜줄 수 있는데.”
은이가 일정을 취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게스트하우스 사장은 잘 알고 있었다. 은이는 끝까지 생색을 내는 사장을 속으로도 비웃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사장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저기, 난… ” 게스트하우스 사장이 말하다 말고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왜 이래?’ 은이는 갑자기 피곤해졌다.
“미안해. 내가 좀 정신이 없지? 이제 다시 혼자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은이 씨 혼자 고생시키면서 알아봤던 다른 일들도 잘 안 되고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결국 자기 연민 때문이었구나.’ 은이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너무 힘드시면 게스트하우스를 잠시 접는 게 어떠세요?” 은이는 진심으로 물었다. 지난 일 년 간 일을 하면서 게스트하우스 운영은 한 사람이 도맡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만난 프랑스인과 결혼한 후에 파리에 따라와 살다가 3년 만에 이혼한 사장은 생계를 위해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게스트하우스를 차렸다고 했다. 은이가 숙박객으로 처음 게스트하우스에 발을 들였을 때 이제 겨우 2년 차를 맞이한 숙박시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관리가 안 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고, 그래서 자신이 일을 돕겠다고 먼저 제안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은이의 말에 사장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당장 내일부터 은이 없이 혼자 그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은이는 해방감과 묘한 승리감을 느끼면서 말없이 흐느끼는 사장의 등에 손을 얹었다. 은이 덕분에 잠시 여유를 만끽했던 사장 앞에 ‘그가 응당 살아야 할 법한 삶’이 다시 펼쳐졌을 것이고, 은이 역시 한국에 돌아가면 그렇고 그런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은이의 마음속에 잠시 나타났던 승리감이나 우월감이 증발하고 그 자리에 연민과 공감이 채워졌다. ‘그래도 이 사람 덕에 나도 잠시 일탈을 할 수 있었지.‘ 은이는 진심을 다해 게스트하우스 사장에게 감사와 위로를 전했다.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이는 아침 일찍 출발했다. 눈이 퉁퉁 부은 사장이 멀찍이 서서 손을 흔들었다. 은이도 함께 손을 흔들었다. 게스트하우스에는 다행히 숙박객이 다 빠지고 한 명도 없었다. 사장에게는 다행인 일이자 한편으로는 불안한 일이기도 할 것이었다.
‘댁도 도저히 못하겠으면 그냥 한국으로 돌아와요.’ 은이는 속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하지만 사장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확신이 들었다. 사장은 불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한국말보다 불어로 말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은이는 그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무작정 한국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한때 사장과 은이가 공유했던 것이었고,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의 자취집으로 돌아온 은이는 깜짝 놀랐다. 집이 너무나 깨끗했기 때문이다. 급하게 나오느라 청소도 제대로 못하고 나왔는데 작디작은 그의 방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어느 한 곳 고장 나거나 한 곳도 없었다. 엄마에게 부탁한 것은 기본적으로 부과되는 공과금 정도가 전부였는데 자주 와서 집을 돌본 것이 틀림없었다. 은이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프랑스에서 사 온 작은 선물을 주러 집에 들르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엄마는 은이에게 짧은 환영 인사를 건네더니 전세계약이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었다. 은이는 석 달 정도 남았다고 대답했다. 이 작은 전세방은 은이가 모은 돈에 부모로부터 받은 돈을 합쳐 얻은 것이었다. 엄마는 은이에게 계속 자취를 유지할 것이냐고 물었다. 은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 그래라.” 엄마의 말에 은이는 놀라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방을 빼서 부모로부터 받은 돈을 돌려달라고 말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일은 무슨. 네가 처음 굳이 그 구석진 곳에 볼품없는 작은 방을 얻을 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었는데, 너 없는 동안 방 청소 한다고 가끔 들르면서 내가 거기 종일 묵기도 했어. 그런데… ” 엄마가 잠시 말을 끊었다. 은이는 말없이 기다렸다. “그런데… 좋더라. 그냥 내가 혼자 거기 앉아있는데 좋더라고. 네 책도 가끔 읽어보고. 그러고 있는 시간이 난 처음이라서. 이래서 네가 그렇게 기를 쓰고 나갔구나 싶었어. 그러니 그냥 거기 있어. 아빠가 뭐라 하든. 돈 좀 모아서 더 좋은 곳으로 이사하고 그래도 좋고.”
“고마워. 고마워, 엄마.” 은이가 목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아, 엄마아빠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그게 다야. 너 이제 시집간다고 그래봤자 더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어.”
“… 응.” 알아. 이거면 돼. 그거면 돼, 엄마.
엄마는 전화를 끊기 전 친구에게서 편지가 왔더라며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고 말했다. 책상 위에는 엄마 말대로 편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로마의 소인이 찍힌 편지 봉투에는 수신인인 은이의 집주소와 이름 외에도 발신인 란에 이름이 하나 덜렁 적혀 있었다.
‘아퀴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