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뜻이야?’
‘나도 몰라. 물어봤지만 대답도 없이 죽어버렸으니까.’
난 재석에게 내일 다시 연락하자고 문자를 보냈다. 재석은 내게 다음에 한 번 만나서 얘기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의미 없는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는 대화를 하느니 이 사진에 대해 좀 더 ‘숙고’해보고, 또한 성호의 문자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고 만나자고 했다. 그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한들 뭐가 달라질 것 같지 않았지만 나는 알겠다고 답변했고, 그렇게 혼란스러운 문자 대화가 종료되었다.
그날 밤 나는 이불속에 얼굴을 파묻은 상태로 잠을 청하려다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유 모를 슬픔이 가슴이 부풀도록 차올랐다. 왜 슬플까. 성호가 죽는 순간 내 소설을 생각했다는 사실 때문에? 어쩌면 성호에게 그 소설이 특별한 의미를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소설이 성호가 죽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니,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먼저 죽음을 생각했고, 그다음으로 소설을 떠올렸겠지. 그리고 기가 막힌 타이밍에 그 사진을, 성호 녀석도 본 것이다. 어쩌면 그쪽이 ‘진짜’ 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믿고 싶어진 것일 지도 모른다. 그 흐릿한 사진을 보며 있지도 않은 기억을 조작해 내고, 향수를 느끼고, 허무하게 흘러가버린 젊음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계속 무의미한 삶을 지속하느니 ‘진짜의 삶’을 실제로 구현하자는 다짐을 했는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 정말로 그의 죽음에 내 소설이 방아쇠 역할을 했다 한들, 내 책임은 아니다.. 절대로 보여주지 말라는 나의 당부를 깡그리 무시하고 성호에게 소설을 보여준 재석의 책임이다. 무엇보다도 재석이 아퀴나스 신부가 될 수 없듯이, 내가 은이가 아니듯이, 성호 역시 수호가 아니다.
하지만 생각은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왜 소설 속 수호를 죽였어야만 했나? 그에게 행복한 삶을 주어줄 수는 없었을까? 아퀴나스, 그 빌어먹을 아퀴나스가 사제가 되어 그가 좋아하는 근사한 사제복을 마음껏 입는 삶을 살게 되었듯이, 혹은 은이가 자신이 원하던, 즉 비록 가난하지만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듯이 수호 역시 자신을 위한 삶의 돌파구를 어떤 식으로든 발견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나는 왜 수호에게만 그렇게 가혹했었던 것일까? 왜 나는 녀석을 ‘정상적이고도 숨 막히는 그럴싸한 삶’에 몰아넣고 그 안에서 꼼짝도 못 하다가 질식해서 죽어가도록 만들었던 것일까. 생각 끝에 왜 내가 슬퍼하는지 알게 되었다. 죄책감과 미안함. 수호에게, 아니 성호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소설 속 수호가 ‘죽어야만 된다’는 이유로 죽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호 그리고 성호도 다른 방법으로 그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거라는 결론 외 다른 가능성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수호는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원하는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죽음뿐이라고 확신했다. 실제 인물인 성호에 대해서라면, 그런 확신을 가질 만큼 그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성호는 수호에게서 자신을 봤을 테고, 그 역시 수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들에게 제시된 길은 단 한 개의 갈림길이었다. 자, 여기 딱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지금의 삶을 지속하는 것, 나머지 하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유로워지는 것이지. 너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수호의 선택이 달랐더라면 성호의 선택 또한 달라질 수 있었을까?
혹은 그 사진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성호는 아직 살아있을까? 대체 그 사진은 ‘진짜’인가, 아니면 ‘착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