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 정리를 마친 은이는 책상 위에 접어놓은 편지를 다시 펼쳤다. 엉성하면서도 과시적인 문장들이 가득 찬 종이를 접혀있는 결을 따라서 곱게 찢고, 다시 몇 번에 걸쳐 잘게 찢어서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 다시 노트를 펼쳤다.
아퀴나스에게.
나는 지금 막 서울의 자취방에 도착했다. 지난 일 년 동안 프랑스 파리에 있었어. 그러니 연락이 안 된 것은 당연하지. 정지되었던 기존의 휴대폰은 내일 다시 복구할 예정이니 앞으로는 다시 연락이 가능할 거야. 하지만 이젠 네가 연락이 안 되겠구나.
왜 갑자기 파리에 갔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건 나 또한 여전히 궁금하다. 내가 왜 그랬을까? 아주 저렴한 항공권이 눈에 띄었고, 그것을 충동구매했고, 그래서 떠났는데 어쩌다 보니 일 년을 거기에서 일하게 되었어. 대단한 일은 아니고, 게스트하우스의 노예로 지냈다. 메이드가 묵던 방에서 일 년이나 기거하며 하루 종일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을 지었지. 체류의 조건으로 어학원에서 불어공부도 했다. 써놓고 보니 굉장하구나.
이 모든 것이 네 덕분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삶의 궤도를 큰 각도로 꺾는 네 모습을 보고 내심 부러웠던 모양이지. 하지만 이게 나의 최선이야. 일 년 간 지겨울 정도로 청소와 빨래를 하고, 와인을 마시고, 불어를 알아듣는 척하고, 도망쳐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 말이지. 이 이상 내가 뭘 할 수 있겠니?
네 세례명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마치 처음부터 너는 아퀴나스였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야. 시간이 흐르고 나면 아퀴나스 사제님 혹은 신부님이라고 불러야 하겠지? 그나저나 나는 천주교 신자도 아닌데 나한테까지 자매라고 불러도 되는 것이냐?
은이가.
추신. 나는 방금 전 이 편지를 쓰기 전에 네게 거짓 편지를 한 통 썼어. 내가 너를 찾으러 로마로 갔다가 일 년 간 체류했다는 거짓된 내용이었지. 어차피 속을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찢어버렸지만, 네게 이 사실을 알면 꽤나 재미있어할 것 같아 굳이 알려준다.
은이가 답장을 받은 것은 서울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난 후였다.
은이 자매에게.
정말 놀랍구나. 네가, 스스로, 비행기표를 사서, 다른 곳도 아닌 파리에, 한 달도 아닌 일 년을, 그것도 주경야독을 하며 지냈다는 것이 말이지. 대체 왜 그랬느냐고 묻고 싶지 않다. 난 그저 네 파격적인 행보에 박수를 치고 싶을 뿐이야.
또한 네가 내게 쓰려했던 거짓 편지를 찢어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 그걸 왜 찢었지? 그것도 함께 보내주었더라면 내가 얼마나 즐거웠겠니!
부탁인데 그 내용을 - 아니, 꼭 그 내용이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파리에서의 생활을 좀 더 자세하게 쓴다던지 해서 내게 보내줄 수는 없을까? 나를 위해 소설을 쓴다 생각하고 말이지. 물론 네가 나 따위를 위해 소설을 쓸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건 네게도 꽤 즐거운 일이 될지도 모르잖아?
네 편지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마.
아퀴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