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가 한 것이 고백인지 공격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는 말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고, 처음 느껴보는 특별한 감정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난감한 얼굴로, 아니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유부녀잖아요. 내게 왜 그런 말을 하죠? 나를 무시하나요?’ 공황 상태에 빠진 배우가 무대 위에서 다음 대사를 입 안에서만 웅얼거리고 밖으로 터트리지 못하듯 나는 계속 그 말을 입 안으로 우물거리고만 있었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그가 채근했다.
“이미 알고 얘기한 거죠.”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이미 알고 있잖아요. 내 마음을.” 나는 간신히 내뱉었다. 그이가 눈을 크게 뜨며 뭐라도 듣겠다는 듯 내게 굽혔던 허리를 곧게 폈다.
“아니, 몰라요. 뭔데요, 당신 마음이?”
“… 이제 와서 아직도 모른다고 하면 비겁한 거죠. 내가 내 입으로 말하는 걸 듣고 싶은 거라면 하지 않을 거예요.”
그제야 그이는 두 손을 들어 코와 입을 가리듯 모았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나는 비로소 그이가 내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는 나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인 것이다. 그의 연기가 너무나 뛰어나 나를 속인 것도 모자라 자신도 속았으리라. 내 감정은 몰랐노라고, 그저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려 했을 뿐이라고. 정말 내 감정을 몰랐더라면 그가 나를 그토록 나를 열망했을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 순간부터 그가 떠나기 전까지 보름 간의 시간 동안 우리는 늘 함께 있었다. 화장실에 가는 시간 빼고는, 눈을 뜨고 있는 시간부터 잠에 빠진 이후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침대가 나의 ‘메이드 침대’ 보다는 조금 더 컸기에 그의 침대에서 함께 잤다. 사람들이 눈치채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동성간계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은 훌륭한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사이에 대해 우정 이상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직 한 사람, 맨 처음 우리 둘 뿐이던 와인 모임에 끼어든 장기 여행객만이 눈치를 챘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에둘러 우리의 사랑을 축하한다고 전해왔다. 건물에 가득했던 여행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모처럼 한가로웠던 하루, 제법 비싼 샴페인을 사들고 온 그는 나와 그이에게 한 잔씩 멋들어지게 따라서 건네고는 자신은 피곤해서 이만 올라가 쉬어야겠다고 말했다. 놀라서 쳐다보는 내게 윙크를 건네고는 재킷을 어깨에 두르고 계단을 올랐다. 그이와 나는 먼저 눈을 마주치고, 다음으로 잔을 부딪쳤다. 함께만 있을 수 있다면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2주는 빠르게 흘러갔다. 우리는 일 초의 흐름조차 모두 체감할 정도로 절박하고도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루하루는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듯 속절없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그가 떠나야 되는 날이 다가왔다. 우리는 작은 침대에서 꼭 끌어안은 채 새벽의 동이 트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떠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내게 돌아올 수 있느냐고만 물었다. 그가 ‘모든 걸 정리하고 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파리가 됐든 서울이 됐든 다시 만나서 함께 하게 될 거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덧붙였다. 나는 파리를 배경으로 우리가 내뱉고 있는 이 대사와 이 장면이 꼭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오래전에 본 어떤 통속적인 영화였을 것이다. 홀로 남겨진 순진한 여자는 연인을 기다리지만 여자에게서 원한 것을 모두 취한 연인은 돌아오지 않는다. 영화의 내용을 생각하던 내가 웃으니 그가 왜 웃느냐고 물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아서.”
“어떤 영화지?”
“운명적인 사랑을 하는 영화.”
“결말이 궁금해지네.”
혼자 기다리던 순진한 여자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자의 아이를 낳고 얼마 후에 죽는다. 오랜 시간이 흘러 여자가 살던 마을에 들른 연인은 자신을 꼭 닮은 자신의 아이 앞에서 망연자실하다가 죄책감과 그리움에 오열을 하며 영화는 끝난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결말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그의 아이를 갖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 내가 웃은 것은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웃은 이유나 영화의 결과를 말해주지 않고 곧 이곳을 떠날 나의 연인이 궁금해하도록 방치했다. 나는 우리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고, 하여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파리를 떠난 후로 다시는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그 후로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갖고 있던 감정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한 번도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식의 고백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되고 싶었고, 그는 그런 나를 마치 자신처럼 대했다. 그가 원한 것은 나였을까, 내게 투영된 그 자신이었을까?
(나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채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짧은 글-이 글-을 써서 그가 알려준 이메일 주소로 보냈다. 그게 이별 통보였다. 그 또한 그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그가 읽었다는 것을 확인했고, 나는 이 글을 삭제해 버렸다. 나 또한 그를 잊을 것이다. 기억의 삭제, 그건 그에게 보내는 나의 복수였다.)
-은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