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이라도 만나러 올 것 같던 재석으로부터는 한 달이 지나도록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성호를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아렸지만 그가 내 소설을 읽었을 뿐 아니라 죽기 전에 언급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의 충격은 점점 무뎌졌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이번에는 세상의 모든 운을 타고난 성호가 죽음을 선택한 것에 대해, 그리고 죽기 전에 쓸데없는 말을 남겨서 내게 부담감을 지운 것에 대해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이 자기 방어본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뭐 어떠냐 싶었다.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고 느슨해진 마음은 몰염치한 말이 되어 튀어나오기도 한다. 바로 이렇게.
“성호가 죽은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죽음은 절박하다기보다는 사치스러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카페 사장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즉시 부끄러워졌다. 말을 주워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절박함도 상대적인 거니까 본인은 절박했을 수도 있겠죠. 아닐 수도 있겠고요. 우리가 그 죽음에 대해 뭐라고 판단하기에는 아는 게 너무 없긴 해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해요. 성호 씨의 죽음 때문에 본의 아니게 마음고생을 하는 중이니까 더더욱 이해하고요.”
성급하고 어리석은 말을 내뱉은 일에 대해 부끄러웠던 나는 사장의 다정한 대답에 마음이 놓였다. 말을 마친 사장이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한 손으로 머리 한쪽을 움켜쥐었다가 풀었다를 반복했다. 그는 드물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는 했는데, 주로 무언가 생각이 풀리지 않을 때 그런 행동을 보이고는 했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내가 슬쩍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가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가락에 힘을 풀고는 내게 웃어 보였다.
“아니요. 괜찮아요.”
늘 그런 식이었다. 내가 사장에게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늘어놓는 것과 달리 사장은 어떤 고민이나 걱정 등 내밀한 감정을 내게 털어놓는 일이 없었다. 내 표정에 실망이 스쳐 지나가기라도 했는지 사장이 급히 덧붙였다.
“옛날에 본,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어요.”
‘거짓말.’ 나는 생각했다. “어떤 내용인데요?”
“음… 어떤 남자가 죽기로 결심해요. 그 이유는 기억이 안 나는데, 우울한 남자예요. 죽는다고 결심한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았을 만큼. 그런데 번번이 실패해요. 총알은 빗나가고, 고층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고.. 실은 그가 죽기 위해 어떤 시도들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요.”
“그래서요?” 사장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물었다.
“남자는 왜 자신이 죽지 못하는지 고민을 하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돼요. 그 사람이 남자가 죽지 못하는 이유를 말해줘요. 너는 소설 속 인물이라 죽을 수 없다고. 자신 또한 어떤 작품 속 인물이라서 벌써 아주 오랫동안 죽지 못한 채 살아오고 있다고 말해줘요. 당연히 남자는 많이 놀라고, 절망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알아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너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너의 소설은 아직 출간되기 전이라서 원본 원고를 없애면 소멸이 가능하다고 말해요. 바로 내일 인쇄를 들어가니 빨리 원본을 없애라고, 그러지 않으면 자기처럼 영원 속에 고통받게 될 거라고요. 우여곡절 끝에 소설가의 집을 찾은 주인공 남자는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는 작가의 옆에 놓인 소설 원고를 발견하고, 바로 벽난로에 집어넣죠.
불길이 원고를 집어삼키고, 남자는 자신을 만든 창조주 작가를 바라보며 그 옆에서 서서히 소멸돼요. 그렇게 영화가 끝나요.”
“비슷한 모티프의 영화를 본 것 같은데 분위기나 결론은 많이 다르네요. 오래된 영화인가요?”
“네, 정말 오래됐어요. 어렸을 때 봤는데 너무나 충격적이라 장면장면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죠. 그런데 슬프게도 제목을 몰라요.”
“…그 제목을 기억해 보려고 노력하던 중이셨던 건가요?”
내 물음에 사장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요. 노력해도 기억이 날 리 없어요. 사실은 갑자기 그 영화가 생각났는데, 하나의 새로운 가정이 떠올라서 혼자 생각해보고 있던 중이에요.”
“어떤 가정이요?”
“음… 만일 작가가, 그 원고에 자신을 등장시켰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 영화의 세계관에 있어서 원고가 세상에서 사라져도 작가에게는 어떤 영향도 없을지, 아니면 작가의 존재도 함께 사라진다든가 하는 일이 생기는지 등등.”
나는 사장의 말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그가 글을 읽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대해 구체적인 상을 갖고 세계관에 대해 생각하는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또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음.. 작가가 자신을 자신의 작품에 반영했다고 해도 그건 역시 모사된 존재이기 때문에 ‘실제 존재’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지 않을까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사장이 이 대답에 만족감을 표해주기를 기대하며. 그러나 사장은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역시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이 세계관에 있어 ‘실제’란 무엇일까요? 그걸 그렇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