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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Sep 22. 2024

26. 아퀴나스에게 보낸 두 번째 이야기


아퀴나스에게.


처음에 여기서 일해도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장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내게 거의 모든 일을 맡기고 밖에 쏘다니기 시작했다. 새로 옮긴 7층의 다락방은 5층 방만큼이나 작았지만 전망은 당연히 더 좋았다. 옆집 지붕 너머로 에펠탑의 꼭대기가 보이는 방이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은 바로 아래층의 비교적 넉넉한 크기의 방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편이라 자주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 게스트하우스는 시설이랄 것도 없었고 방의 상태도 형편없었지만 위치에 비해 가격이 꽤나 저렴했기에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손님의 대부분은 한국인이었고, 어디서 소개를 받았다며 간혹 일본이나 대만 등에서 온 여행객들이 묵으러 오기도 했다. 그들은 내가 사장인 줄 알았다가 아니라고 말하면 이내 눈빛이 묘하게 변하고는 했다. 유학생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아니라고 대답하면 당혹감과 함께 은근한 의심의 눈초리가 되돌아왔다. 그래서 한 달쯤 지난 후부터는 유학을 왔다가 돈이 필요해 잠시 일하는 중이라고 대충 둘러대고는 했다. 사람들은 대답을 듣고서야 뭔가 안심한 듯 표정이 편안해졌다.


방의 개수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할 일은 끊이지 않았다. 청소와 빨래 서비스 외에 간단한 아침식사 준비라고 말했을 때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장이 자리를 아예 비우기 시작하자 체크인과 체크아웃, 간단한 손님 응대도 모두 처리해야만 했다. 문제는 내가 파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 여행 루트를 짜면서 조언을 바라는 손님들에게 해줄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일을 하기 시작하고 보름 후에 사장은 내가 좀 더 오래 일해주기를 바랐고, 장기체류를 위해 어학당에 다니는 것을 돕겠다고 말했다. 어학당 등록 비용이 상당했기에 나는 그렇게까지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사장은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가 돈을 모두 대준 덕분에 추가로 비용이 들 일은 없었지만 몸은 더 고달파졌다. 아침부터 밤까지 한치의 여유가 없었다.


신기한 것은 그런 생활도 결국 익숙해진다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성실하게 살 수 있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몹시 놀라울 지경이었다.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간단히 씻고, 나의 방을 청소하고, 30분 내로 1층의 주방으로 내려가서 조식준비 - 토스트용 빵과 바게트, 크루아상과 버터, 잼, 삶은 계란과 간단한 샐러드, 커피와 각종 차가 구비되어 있는 배식대를 준비하는 정도 - 를 하고, 식사를 하러 내려온 손님들이 팁과 함께 맡긴 각종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아홉 시쯤 대충 식사들이 정리되면 나도 앉아서 빠르게 식사를 했다. 혹시라도 일찍 체크아웃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식사를 거를 때도 있었다. 아침 10시 수업이 있는 날이면 사람이 가득한 메트로를 타고 숙소로부터 몇 정류장 떨어져 있는 어학원에서 하나도 알아먹지 못할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세탁기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 빨래를 옥상의 아주 작은 공간에 갖고 가서 널었다. 그 후 어지럽게 널려있는 조식 테이블을 치우고, 방 청소를 시작했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단 청소.


청소가 모두 끝나면 내일의 조식을 위해 채워 넣을 것이 없는지 살펴봤다. 바게트와 크루아상은 거의 매일 사다가 채워 넣어야 했기 때문에 사장이 준 최소한의 운영비를 가지고 근처의 저렴한 빵집과 채소 가게에 매일 들렀다. 그렇게 오가는 길은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바게트를 품에 안고 숙소로 돌아갈 때면 내가 정말 파리지앵이라도 된 듯 느껴지기도 했다. 유독 피곤한 날이면 그마저도 고단해서 마냥 눕고 싶었지만.


사장은 내게 많은 것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이 정도 부려먹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태도를 내내 유지했다. 거의 일면식도 없는 내게 해준 것들을 생각하면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나는 거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신나게 놀러 다니는 사장을 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손님들 중 또래의 여자 손님들 중에는 사장이 나를 너무 착취하고 있다며 측은하게 여기기도 해서 조식 설거지 같은 일을 돕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다정함은 나를 무장해제 시켰다.


네게만 말하는 건데, 한 달 정도가 지난 후부터 나는 숙소 예약을 문의하는 사람들의 태도나 성별, 나이 등을 고려해서 적당히 골라 받기 시작했다. 일하기 시작한 초반, 진상 숙박객에게 매우 무례한 일을 당한 후로 숙박을 의뢰하는 사람들의 메일을 신중하게 읽고, 몇 차례 짧지만 태도를 알 수 있는 정도의 메일을 주고받은 후, 진상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 사람들만 숙박을 허용했다. 사장은 내가 그러고 있는 줄을 끝까지 몰랐다. 방이 있어도 없다고 하는 경우에 가끔 빈 방이 생길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사장이 ‘방 비우지 말고 풀로 받으라’며 내게 잔소리를 하고 지나가기도 했다. 나는 예의 바르게 무조건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그 후로도 나는 내 마음대로 손님을 가려 받았다.


다행히 내가 관리를 맡은 이후로 게스트하우스의 평판은 매우 좋아졌다. 사장 혼자 일할 때는 전혀 관리를 하지 않은 수준이라 위생상태나 조식 등이 매우 부실했는데, 내가 운영을 맡은 후로 청결과 조식, 친절도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어 빈 방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감사하다며 따로 팁을 챙겨주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는 그렇게 받은 돈으로 질 좋은 와인을 사다 마셨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지나자 나는 이제 그만 도망가고 싶어졌다. 창 밖으로 보이는 맞은편 건물의 고색창연함과 창가의 제라늄 화분, 그 너머로 보이는 반짝이는 에펠탑의 꼭대기라든가 바게트, 주먹만 한 마카롱, 혀에 감기는 온갖 버터와 치즈까지도 다 감흥이 없어졌다. 나는 서서히 도망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는 내 앞에 그이가 나타났다.)


이만 총총. 은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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