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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백 Jun 27. 2023

태국. 남들이 관광할 때 내가 무에타이 링에 오른 이유


 피가 끓는 종족이 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강해지고 싶고, 싸우고 싶고. 끓어오르는 힘을 온통 운동에 쏟아부은 어린 시절이 있었다. 


 뜨거웠던 여름날, 나는 태국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훈련 생각 밖에 없었다. 파이터로 살면서 한 번은 정점을 찍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태국의 무에타이 체육관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유명한 코치들이 포진해 있는 곳이었다. 나같이 소문을 듣고 각국에서 모인 외국인 훈련생이 많았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일차적인 상대는 더위였다. 사람들이 태국으로 휴양을 올 때 나는 그곳에서 땀을 바가지로 쏟아부으며 훈련을 받았다. 하도 땀을 많이 흘려서 내 땀에는 더 이상 소금기가 없었다. 끝없이 몸에서 배어 나오는 땀에는 짠내가 나지 않았고, 훈련을 하고 난 후엔  본능적으로 짜디짠 음식만 찾았다.     


 도박성을 띄는 태국의 무에타이 경기장에, 나같은 외국인 선수는 인기가 좋았다. 태국에서 훈련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코치는 나를 태국에서도 꽤 유명한 방라스타디움에서 싸우도록 시합을 잡아 주었다. 영국으로 축구유학을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프리미어리그에 들어가 시합을 하는 것과 같은 영광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얘기하자면 당시 나의 영어가 그렇게 유창하지 않을 때였기에 코치가 하는 말을 대충 눈치로 알아듣고 “예스, 예스, 오케이, 오케이” 하며 대충 대답을 하다 잡혀버린 시합이었다. 어쩐지 다음 날부터 갑자기 맹훈련이 시작 되었다. 3라운드 받아주던 미트를 5라운드씩 받아주고, 혼자 샌드백을 치고 있으면 계속 한 놈이 따라와서 샌드백을 잡고 소리를 지르면서 사점으로 몰아넣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던 차였다. 나는 코치와 이야기를 나눈 며칠 후에야, 내가 방라 스타디움에서 그것도 태국 선수와 경기를 뛰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난 후에 느낀 공포는 말도 못 한다. 산에서 곰을 만나거나 멧돼지를 만난 것과 같은,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삐쭉 솟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지리산에서 곰을 만난 적도 있고 멧돼지 사냥을 하느라 멧돼지를 마주친 적도 수십 차례다.) 내가 무에타이를 접한 것은 겨우 고등학교 때였고, 당시는 무에타이라는 운동을 배운 지 십 년도 채 되지 않았던 때였다. 군대 제대를 한 다음, 그제야 제대로 훈련을 한 번 받아보고자 태국을 찾은 것이었기 때문에 거의 초보자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태국에서 며칠간 운동을 하며 보아온 태국 선수들의 강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이 새파란 신예 선수가, 종주국의 본토인과 싸워야 한다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한 발 들고 서 있을 균형감각도 없을 겨우 여섯, 일곱 살 때부터, 킥을 차고 주먹을 단련하는 전통 낙무아이(무에타이를 하는 사람을 부르는 태국어)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에타이의 무서움은, K1이나 UFC에서도 알려졌듯, 오죽하면 전 세계인들이 무에타이 룰 중 하나인 엘보나 무릎가격을 빼고 경기를 하자고 건의할 정도로 과격했다. 무에타이 시합 중 부러지는 것은 다반사고, 죽어나가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남자라면 한 번쯤은 강해지고 싶은 것 아니겠는가. 그런 환상에 태국까지 기어들어와서 땀을 한강처럼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에게 태국 선수와의 대진을 붙여주다니. 나는 겁이 나서 밤에 잠도 오지 않았다. 상대방 선수의 정보도 하나도 몰랐고, 태국의 링 위에서는 어떻게 싸우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코치에게 물어보니 상대 선수는 전적이 100 전이 넘는다고 했다. 나는 사기가 완전 꺾여 버렸다. 내가 고등학교 때 뛰었던 아마추어 경기 7전을 포함해서 내 평생의 경력을 깡그리 끌어 모아도 겨우 20 전이 넘었는데. 승산이 없어 보였다. 나는 몇 번이나 시합을 못 하겠다고 얘기를 할까 망설였지만, 그러기엔 한국인으로서 가오가 너무 떨어지는 것 같아 차마 못 한다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었다.

 시합이 잡히고 난 뒤로는 체육관에서 장난도 치지 않게 되었고, 입맛도 싹 가셨다. 원래 시합 전 날에는 잠을 많이 자고 컨디션 조절을 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법인데 나는 전 날 밤새 뒤척이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얼굴에 바셀린을 바르고(가죽 글러브에 쓸려 얼굴이 커팅되는 것을 방지), 몽콘을 쓰고 팔에 쁘앗지앗을 차고 (무에타이 경기 전 쓰는 일종의 전통 액세서리) 링 위에 올랐다. 우리 무에타이 캠프만의 와이크루 (무에타이 시합 전에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예의를 표하는 전통 의식)를 배워갔는데, 몸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링 안에 들어가 링줄을 잡고 한 바퀴를 돌며, 흥나게 와이크루를 추고 있는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상대 선수는 꽤 여유가 있어 보였다.

 ‘땡~’

 1라운드를 알리는 공소리와 함께 관중들이 소리를 쳤다. 무에타이 경기장에는 경기를 보러 온 도박꾼들이 꽤 많이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어쩌면 조금 소극적으로 상대 선수의 간을 봤다. 그런데 1분이 채 되지도 않은 시간 동안 주먹 교환을 몇 번 해 보니까 감이 왔다.

 ‘오, 이건 내가 해볼 만하다.’

 1라운드가 지나고 나니까 자신감이 생겼다. 코치가 세컨석에서 나에게 뭐라고 외치며 많은 조언을 해줬다. 그렇잖아도 정신없는 통에 영어가 더 잘 안 들려 나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 

 2라운드를 뛰는데 잘하면 내가 이길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경기를 풀어갔다. 상대 선수는 나보다 키도 훨씬 작았고 힘도 달렸다. 

 경기가 뒤로 갈수록 내 펀치에는 힘이 실렸고, 내가 정확한 공격 포인트를 지를 때마다 관중들은

 ‘어에이! 어에이!’

 하며 나를 응원하는 듯 보였다. 나는 끝까지 집중력이 흩어지지 않게 집중하며 최선을 다해서 싸웠다.

 그리고 이겼다.      

 나중에 알고 보니 외국 선수들에게는 미스매치를 많이 잡아준다고 한다. 그리고 상대 선수의 100전이라는 것은, 꼬꼬마 어린 시절부터 카운트가 된 것이었다고 했다. 몸무게도 나와 6kg 정도 차이가 났다. 그래도 어쨌든 상대 선수는 그때까지 내가 본 중 가장 정교하고 노련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나에겐 값진 경험이었다. 시합 후, 상대 선수를 안아줄 때에 나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싸워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도, 나도 다 같은 인간일 뿐이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어떤 경기장에 서더라도 더 이상 쫄지 않게 되었다. 그 후 훨씬 더 큰 대회에서 더 강한 상대를 만나 보았지만 이때만큼 긴장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태국에서의 훈련을 하며 배운 기술보다 더 값진 것이 첫 방라 스타디움에서의 경기 경험이었다.      


 이후 나는 30대 초반이 될 때까지 무에타이 선수로서의 생활을 이어 갔다. 경기를 계속 뛰다 보니 어느 순간 초탈을 하는 순간이 왔다. 다치면 다치는 거고, 부러지면 부러지는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경기를 대하는 자세가 한층 덜 부담스러워졌다. 본격적으로 대회를 많이 뛸 때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시합을 잡았다. 회복도 되기 전에 다음 시합을 잡고 또 다음 시합을 뛰었던 것이다. 나 스스로를 담금질해서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실험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피가 터지고 살이 터지게 원 없이 싸우고 나니, 은퇴를 할 시점이 되었다. 후회나 아쉬움, 미련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은퇴를 하자마자 많이 먹고 많이 자고 많이 쉬었다. 더 이상 몸을 쓰지 않아도 되자 살 것 같았다.     


 10여 년이 넘는 격투기 선수생활은 나를 키운 성장 동력이었다. 평생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산다는 것은 치열한 싸움이다. 삶은, 정글이기 때문이다.

 격투기 선수 시절만큼 힘들 때가 없을 것이라는 어릴 적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삶은 살면 살수록 더 큰 난관의 보따리를 내 앞에다 풀어놓았으며, 사업을 하는 내내, 처음 맞닥뜨린 태국선수와 같은 낯선 어려움은 계속해서 찾아왔으니까.     


 선수 생활에서 내가 배운 가장 큰 수확은 바로 마인드컨트롤이다. 발생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 법, 나는 뚫고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법, 좀 맞아도 괜찮다는, 다음번에 때리면 된다는 의연한 마음을 갖는 법. 사업을 해 나가는 한, 아마 나는 죽는 날까지 이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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