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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백 Jun 29. 2023

취업? 난 그딴 거 못해

   

 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매우 잘 알게 되었다.

 “아, 나는 단체생활을 할 수 없는 인간이구나. 누구 밑에서 일하라고 하면 견디기 힘든 스타일이구나.”

 학교 다닐 때부터 마이웨이로 사고를 치며 다녔기 때문에 나는 물론 부모님도 학교에 많이 불려 갔다. 늘 반항했고 뺀질거렸다. 학교를 다닐 때는 나는 무능아였고 조직 생활에 맞지 않는 루저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용돈을 주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벌어서 체육관도 다니고 오토바이도 타야 했기에 신문배달, 중국집배달 등의 일을 가리지 않고 했는데, 그때 역시 조직문화는 나에게 정말 맞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면 나는, 작은 중국집을 차리는 한이 있더라도 내 사업을 하고 말리라, 내가 만든 왕국에서 내가 왕이 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고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다.     


 스무 살 때 군대를 갔다가 제대하고 중국에 유학을 갔다. 당시 한국에는 중국에서 들여오는 무술용품을 구하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나는 그때 두한 형이랑 다음 카페를 개설해서 중국에서 물건을 사다 주는 보따리장사, 즉 판매 대행을 했다. 아는 인맥들이 원하는 제품은 정해져 있었고, 학교 앞에 파는 제품들이 대부분이라 우리는 품을 크게 들이지 않아도 용돈벌이를 할 수 있었다. 갓 스물몇이었던 우리는 적은 돈이라도 벌며 기뻐했는데, 당시 나는 두한 형에게 말했다.

 “형, 나중에는 아마 우리 더 큰 사업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분명히 그런 날이 와요.”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나 형은 중국에서 여러 사업을 하다 코로나로 한국에 들어왔는데 그 참에 우리 회사 상무님이 되어 어릴 적 내가 했던 예언대로, 지금까지도 우리와 지금도 함께 일을 하고 있다. 중국 유학 시절 만들었던 다음 카페가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몇 년에 한 번 생각나면 들어가 본다. 궁금하기도 하고, 그곳에 들어가면 밤새 카페 단장을 하며 새로운 손님맞이에 들떠 있었던 마음가짐이 떠오른다.     


 중국 유학 중, 방학이 되면 한 달여 동안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는 2000년대 초중반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물가 차이가 많이 났고 알리바바나 1688이 유행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떼다 팔면 마진을 많이 남길 수 있는 장사거리가 많았다. 때는 지하철 잡화판매가 가능했던 시절, 나는 중국에서 질 좋고 저렴한 지포라이터나 당시 유행했던 1000피스짜리 퍼즐을 가져다 팔았다. 장사는 곧잘 잘 되었고, 300%에서 500%의 마진이 남았다. 하지만 나도 당시 어렸고 숫기도 없었기 때문에 넉살 좋은 아저씨들처럼 보따리를 척 풀어놓고 큰 소리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한국의 유행을 유심히 관찰하다 딱 유행하는 제품들을 가지고 와 팔았고, 내 제품과 가격이 좋았기에 판매를 곧잘 할 수 있었다. 하나 둘 판매가 되기 시작하자 손님들에게 제품을 소개하는 내 목소리는 점점 커져 갔고, 고객들을 응대하면 할수록 노하우도 쌓여갔다. 내가 살던 안양에서 1호선을 타고 서울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방식으로 일을 했는데, 이렇게 몇 번 하지 않고도 매 방학 때마다 150만 원여 돈을 벌어 갔다. 당시 중국에서는 학비, 기숙사비 비행기표를 제외하고 한 달에 드는 생활비가 30만 원 남짓이었으므로 거의 방학 때마다 중국에서의 모든 생활비를 벌어갔던 셈이다.     


 중국에서 살며 연차가 더해지자 나는 중국사람들에게 무에타이를 가르쳐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중국은 본토 무술보다는 태권도가 훨씬 유행했고 타이췐이라 불리던 무에타이에 대한 관심 또한 높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한인촌에서 유명한 호텔 한 켠의 대형헬스클럽을 빌려 강습을 열었다. 호텔에는 당시 중국 물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의 피부샵이 잘 되고 있었는데, 그 호텔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경제적 수준이 가늠되어 흔쾌히 돈을 내고 운동을 할 사람들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체육관을 다니며 관장님을 대신해 가르쳐본 경험이 많았으므로, 가르치는 프로그램 따위는 머리에 훤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회원들은 설 곳이 없어서 빽빽하게 끼여서라도 하나 더 배워 보겠다고 열심히 나왔다. 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교습법을 생각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결국 무에타이 교습소는 내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1년 넘게 성황리에 운영을 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유학비의 대부분을 아낄 수가 있었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나는 본격 내 사업을 할 기초를 쌓았다. 경험, 지식, 거래처, 그리고 내 손에는 틈틈이 모아놓은 자본금 천만 원이 남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정식으로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다시 태국행 티켓을 끊었다. 이번에는 훈련이 아닌, 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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