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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백 Jul 03. 2023

이 정도면 나도 회사 만들만 한데?

 자본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사업에는 제한이 있었다. 치킨집이나 카페 같은 근사한 창업은, 할 마음도 없었지만, 차릴 돈도 없었다. 나는 내가 가장 잘하는 체육용품을 판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하며 내가 직접 써보면서 ‘나라면 이렇게 만들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보완해서 판매하기로 했다. 


 태국 출장을 갔다. 어릴 적부터 같이 운동을 했던 승현이를 데리고 갔다. 우리는 멋모르는 20대였다. 승현이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형 따라 놀러 가는 기분으로 따라나섰지만, 최초의 사업 아이템을 선별하러 동행한 그는, 그로부터 15년 후 우리 회사의 재무 이사를 맡게 되었다.

 운동을 좋아했던 우리 둘은 무에타이의 성지 룸피니 스타디움과 그 양대산맥인 라차담넌 스타디움에 가서 실컷 구경을 했다. 그리고 격투장비계의 명품이라 여겨지던 트윈스와 인터 복싱장비의 본사를 찾았다. 구글 지도와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물어 물어 찾아갔는데, 작은 마을의 외딴 주택과 같은 집이었다. 제품을 공급받을 수 있을지 다짜고짜 물어보았다. 선 사입을 한다고 하니 생각보다 물건을 받기는 수월했다. 회사들의 규모나 공장 환경이 생각했던 것보다 영세했던 것에 우리 둘 다 놀랐다. 


 당시는 갓 인터넷 쇼핑몰의 붐이 불었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인터넷을 활용하면 전국적으로 복싱 글러브나 용품들을 좀 더 손쉽게 공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은 지마켓이 된 구스닥의 1세대 판매자였다. 하지만 밤새 포토샵을 연구해 ‘링몰’이라는 격투용품 전문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인터넷 쇼핑몰 대박 신화와 같은 큰 반응은 없었다. 나의 주 고객층은 인터넷이 뭔지도 잘 모르는 전국 체육관의 관장님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2000년대 후반이었음에도, 계좌이체를 하지 못하는 고객이 있어서, 나는 물건을 들고 직접 가져가서 현금을 결제받아 오기도 했다.


 인터넷에 제품을 올려놓기만 하고 가만 앉아 있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어, 태국에서 수입해 온 다양한 제품들을 승용차 트렁크에 싣고 가까운 지역부터 체육관을 하나씩 돌기 시작했다. 신기한 물건들을 많이 싣고 다니는 나를 관장님들은 곧잘 기억해 주었고, 판매처가 많이 없었던 희귀한 제품들은 입소문도 금방 퍼져 곧잘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전단지를 만들어 돌리며 매주 틈날 때마다 전국 체육관을 돌자 6개월이 지날 무렵부터는 전화통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관장님들은 때때로 태국 현지 무에타이 선수들이 쓰는 능남오일이나 몽콘과 같은 특이한 액세서리를 선주문하거나, 없는 제품을 구해다 달라고 요청을 했다. 고객층이 많아지고 수요가 많아지자 재고도 점점 늘어났다. 구색이 많아졌고, 내 방 한 켠에 쌓아두었던 재고들은 부피가 늘어나 도저히 더 이상 보관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돈을 벌었지만, 벌면 벌수록 재고를 늘리는 데에 투자를 해야 했다. 다행히 격투기용품과 같은 제품은 유통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썩는 것도 아니라 폐기될 염려는 없었으나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자본은 개미지옥과 같이 끝이 없었다.

 사업을 하면 할수록 돈이 부족했다. 이런 현상은 사업을 하는 내내 지속되었는데, 지금도 역시 똑같이 겪고 있다. 규모가 커지면 커지는 만큼 돈이 쪼달리고, 규모를 키우면 키울수록 더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회사가 성장을 하지 않으면 뒤처지니까 성장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기에 어떤 회사라도 늘 자금에 대한 압박이 있고 그렇기에 자칫 한 번 투자를 잘못했다가는 회사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아슬아슬했지만 처음 시작한 사업이 몇 년 동안 순조롭게 지속되었다. ‘링몰’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내 전화로 주문을 걸어주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자, 나는 ‘현타’가 왔다. 이렇게 남의 물건을 백날 팔아봤자 본사의 재고가 떨어지면 나도 함께 판매를 종료를 해야 했고, 고객들은 물건이 떨어지면 곧잘 떠났기 때문이다. 

 나는 돈을 끌어모아 내 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알리바바를 이 잡듯이 뒤져, 전 세계에 있는 복싱 글러브를 제조할 수 있는 공장을 찾았다. 100개가 넘는 회사를 검토했던 것 같다. 그전에 국내 공장을 몇 군데 돌았지만 내가 원하는 퀄리티와 가격이 나오지 않았다. 나도 처음 해 보는 OEM 제조였기 때문에, 원가가 아무리 싸다고 해도, 관세, 통관비, 운임을 포함한 모든 가격이 맞추어질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알음알음 대충 계산을 해보니 국내에서 만드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 보였다.

 당시 나에게는 조언을 해주거나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와 같은 방식으로 체육용품사업을 하는 선배가 없었을뿐더러, 있었다 해도 영업 비밀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걸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에 뭘 해도 혼자 연구하고 알아보는 방법을 썼다. 인터넷이라는 도구가 나에게는 천군만마였다.

 해외 판매자들을 둘러보니 퀄리티적인 측면에서 마음에 쏙 드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격투장비용품도 철철이 유행하는 제품들이 있다. 벨크로 방식이나 패딩 등 디테일한 차이로 마니아들은 구매여부를 결정한다. 그렇게 거래 할만한 공장을 추스르다 보니, 한 공장의 제품과 가격이 내 마음에 얼추 맞았다. 

 일단 샘플을 몇 개 받아본 후 최종 해외 공장과 담판을 짓기로 했다. 처음이라 소통도 잘 되지 않고 제품이 잘못 나올까 봐 조바심이 났다. 나는 현지 공장행 비행기표를 결제했다. 당장 돈이 없어도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보고 체크해야 할 디테일들이 많았다. 처음 브랜드를 선보이는데, 대량생산한 제품에 하자라도 생기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스티치 하나라도 잘못 나오면 안 될 일이었다. 


 그렇게 첫 브랜드 ‘킹스턴’이 출시되었다. 

 내 제품을 만들기로 작정한 것은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것도 있지만 태국 출장 때 보았던 유명 브랜드의 격투용품 회사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던 데에 자신감을 얻은 것도 있다.

 ‘이 정도면 나도 할 만 한데?’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웬만한 복싱 격투기 브랜드의 본사 전경을 다 꿰고 있다.  멕시코의 그랜트가, 홍콩의 하야부사 본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들은 어떤 공정으로 물건을 만드는지 알고 있다. 업자로써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갓 나온 브랜드가 기존의 브랜드들과 똑같으면 팔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저가형 백글러브’ 시스템을 도입했다.

 초보자가 체육관에 입관을 하면 너무 좋은 글러브는 필요가 없다. 그런데 당시 체육관 관장님들에게는 관원들에게 장비를 '팔아먹는' 것을 미안해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체육관에서는 공용 글러브를 돌려 썼다.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치거나 미트를 3라운드만 쳐도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 가죽 글러브의 내부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는다. 그걸 온 체육관 사람들이 돌려 쓰는 것이다. 위생적으로도 좋지 않고 수련생들의 마음가짐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초반에 몇 개월 쓰고 버리더라도,  패딩이 얇은, 샌드백 치기와 연습용으로 나온 저가형 인조가죽 백글러브를 선보인 것이다. 게다가 웬만한 가죽글러브의 1/3도 되지 않는 가격에 판매를 했다.     


 이제, 남은 것은 관장님들에게 이걸 홍보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자동차 트렁크에 제품을 채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전국을 돌기로 했다. 이번에 가득 채워진 트렁크의 모든 제품은 내가 만든 이름, ‘킹스턴’의 것이었다. 킹스턴 카탈로그도 제작해서 뿌렸다. 기존 고객 관장님들이 많았기 때문에 킹스턴 백글러브의 시장 진입은 쉬웠다. 관원들의 반응도 좋았다. 글러브를 사고 싶은데, 관장님이 사란 말을 안 해서 못 사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관장님들은 회원에게 판매를 하며 크지 않아도 마진을 남길 수 있으니 서로 좋은 셈이었다. 


 일 년이 지나자 크고 작은 체육관들에 킹스턴 제품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라인업을 구축했다. 정강이보호대, 헤드기어, 발목보호대, 낭심보호대 등, 한 번 만들어 보니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감이 왔다. 나는 밤마다 제조업자와 스카이프 채팅을 주고받으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킹스턴’ 이름이 박혀 나온다는 생각에, 잠을 안 자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나는 인터넷 1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으로 접하는 것보다 실제로 접한 것의 힘을 나는 믿는다. 옛날 고객님들에게는 인터넷 화면 속의 제품이 더욱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스칸다로 이름이 바뀐 우리 제품을 최대한 많은 대회에 내보내는 이유도 이것이다. 직접 보고, 직접 껴보는 경험을 한 고객들이 우리 제품의 진가를 더욱 알아주기 때문이다. 초창기에 겁 없이 배짱으로 시작한 맨투맨 영업이야말로 내가 이제껏 했던 영업 중 가장 효과가 좋고 사람 냄새나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도 온라인 영업을 집중적으로 하고, 더 효과적이고 정확한 전달을 위해 영상을 찍어 홍보를 하지만, 아직도 틈만 나면 관장님들과 만나고 악수를 하며 그들에게 의견을 듣는다. 이 작업은 내가 이 브랜드와 작별을 고할 때까지 쭉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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