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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별하 Oct 04. 2021

[정별하 논픽션] 분식집


착잡한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버스를 타고 꽤 오랜 시간을 가다가 시가지를 벗어날 즈음 뜬금없이 커다란 건물 하나가 나온다. 내가 내릴 곳, 병원이다.


최근 건강이 다시 악화되어 며칠째 이 근방 정류장을 왔다 갔다 했다. 그때마다 고장나 있는 버스도착 알림판. 애초에 오는 버스가 2대밖에 없어서 나 말고 다른 이용객은 있나 의문이 드는 정류장이다.


그 버스정류장 바로 옆에는 그 동네를 꼭 닮아 간판이 많이 낡은 분식집 하나가 있다. 요 며칠 이 근처를 오가며 버스를 탈 때마다 유난히 마음이 갔던 곳이다. 어느 날은 열린 문 사이로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파를 다듬는 할머니를 보기도 했다. 아, 장사를 하긴 하는구나.


그도 그럴 것이 외관만 보면 장사를 접은 지 최소 6개월은 되었을 법하게 글씨는 다 색이 바랬고 문 앞에 살짝 놓인 분식이라고 적혀있는 내 무릎 높이 정도의 조그만 팻말이 이 분식집이 장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유일한 표시였다.




병원에선 자꾸 수치가 떨어지지 않아서 추가 검사를 요구했고 그때마다 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러다 다시 전처럼 안 좋아지면 어떡하지? 완전히 나을 수는 있는 건가. 아무 이상증세 없이 잘 지내던 평화로운 내 일상에, 이 지긋지긋한 병은 불쑥 찾아와 나를 한없이 망가뜨린다. 그래도 이번에는 꽤 오래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나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다.


벌써 3일째 연속으로 피를 뽑아 검사를 하고 초음파를 찍고 또 무서운 기계들로 자꾸만 내 몸을 헤집어 놓는다. 분명히 사람을 치료하는 병원인데, 올 때마다 내 몸은 더 망가져만 가는 것 같다. 3번이나 피를 뽑았지만 수치가 계속 나아지지 않아서 오늘 한번 더 다른 검사 요소를 추가해 피를 뽑아보기로 했다. 이번 검사는 뽑고 나서 1시간 정도 지나면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저번 주부터 시작해서 일주일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지긋지긋한 검사도 한 시간 후면 또 다른 검사가 필요할지 여기서 그만 검사해도 될지 결정이 난다. 재판을 받고 선고를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도대체 나의 무슨 죄를 심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피를 뽑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예정에 없던 비는 시간, 문득 3번째 피를 뽑던 날 낡아빠진 분식집 문틈 사이로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 것이 생각났다. 어쩌면 오늘이 이 병원에 오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아니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 오늘은 반드시 그곳을 가야겠다는 어떤 확신이 들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1시간이면 충분히 가서 밥을 먹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뭔가를 기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인사를 하며 들어가자 앉아계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눈이 동시에 나에게로 향한다.

라면 하나 될까요?

물어보고 자리에 앉았다. 담소를 나누시던 할아버지는 마시던 커피를 급하게 다 마시고는 어딘가 기뻐 보이는 뒷모습으로 일어나시더니 갑자기 선풍기를 틀어서 나에게 향하게 해 주시고 후다닥 사라지셨다. 아마 주인 할머니와 담소를 나누시던 동네 어르신이 아니었나 싶다.


허기가 돌길래 김밥도 먹고 싶었는데 김밥은 아직 안된다고 하셔서 라면 하나만 주문하고 앉아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열심히 내부를 두리번거렸는데, 벽에 걸린 커다란 달력에서 왠지 모를 정감이 느껴졌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틀어주신 선풍기 바람을 쐐며 기분 좋게 앉아있는데 아뿔싸. 그 어디에도 카드리더기가 보이지 않았다.


저기 혹시 카드결제되나요...?

조심스레 물었고

안되는데..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그러면 혹시 계좌이체는 안 되나요..?

응.. 안되는데..

아. 안된다니. 나는 오늘 여기서 꼭 라면을 먹고 싶었는데.

아 저 그러면 은행 가서 현금 뽑아올게요.

가방을 챙겨서 일어나려 하는데 할머니의 눈빛이 애처롭다.


다시 올 거지? 뽑으러 어디 가려고?

아 저 횡단보도 맞은편에 은행 있더라구요. 금방 올게요.

그래, 끓여놓을 테니까 꼭 다시 와야 해.

문을 나서는 나를 바라보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얼른 다녀와야겠다.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도 저쪽 편에는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높은 건물들이 잔뜩 들어서 있고 양복 입은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나는 얼른 현금을 뽑고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서 이쪽 동네로 돌아왔다. 저쪽은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다. 나랑은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분식집으로 들어가 뽑아온 만 원짜리를 식탁 위에 놓고 앉으니 할머니가 반가운 기색으로

계란 넣어줄까?

물어보신다.

하고 웃으니 할머니도 웃으며 라면을 갖다 주셨다. 기분이 좋으신지 맞은편에 앉아서

김치는? 물도 줄까? 내가 밥을 먹어야 하는데.. 점심에는 그래도 손님이 올 수도 있어서..

하시며 밥과 반찬 두 가지 정도를 꺼내서 내 앞에 앉으셨다.


같이 식사를 하는데 나를 슥 보시더니

밥도 줄까?

하시곤 밥을 한 숟가락 떠서 라면에 넣어 주셨다.

아, 감사합니다.

하고 먹으려 하는데 한 숟가락 더 주시며

나는 안 올 줄 알았어. 돈 뽑으러 간다고 하고 다시 안 오는 사람들이 많거든. 오늘 마수네, 마수야. 고마워. 많이 먹어.

하시며 마치 길가에 핀 꽃을 발견한 소녀처럼 좋아하셨다. 배부르게 밥을 다 먹고 짐을 챙겨서 일어났다.


잘 먹었어? 고마워.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잘 먹었어요. 안녕히 계세요.

어쩐지 문을 열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검사 결과를 받으러 끔찍한 병원으로 다시 가야 하는데도 어딘지 모르게 신이 났다. 아마 내가 그동안 다녔어야 하는 병원은 여기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기분 좋게 도착한 병원,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다. 무슨 짓을 해봐도 떨어지지 않던 수치가 단번에 정상으로 떨어진 것이다. 어쩌면 내가 걸렸던 병은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지 않았을까. 분식집 외관에 비해 내가 예상했던 라면값보다 비싸서 현금을 뽑으려고 ATM 앞에서 갈등하던 그 순간. 할머니의 얼굴이 생각나며 후다닥 현금을 뽑았을 때, 아마 내 안의 병마들이 자취를 감추어 주지 않았을까.


아마도 나는 그동안 차가운 도시에서 이런 '정'이 모자라 병에 걸린 걸 지도 모르겠다. 환하게 웃으시며 좋아하시는 모습 앞에, 돈 뽑으러 간다고 하고 다시 안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 콕 박혀서 나는 그러지 않고 다시 오기를 정말 잘했구나. 병과 싸우느라 얼어버린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내 병까지 같이 녹아내렸구나. 어쩌면 병이 생겨서 마음이 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얼어버려서 병이 생긴 것일 수도 있겠구나.


언젠가 다시 같은 병이 나를 찾아온다면, 그때 다시 이 분식집을 찾아와야겠다. 그때까지 건강히 잘 지내세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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