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우리 동네 입구엔 커다란 플랜카드가 하나 붙어있었다.
'1998 대곡초등학교 가을운동회 뒷구지 선수단 모집' - 뒷구지 마을회장
한 달 정도 뒤에 열리는 대곡초등학교 가을운동회에 뒷구지 선수를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초등학교 운동회에 무슨 동네 선수를 뽑느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름만 초등학교 운동회이고, 실제로는 대곡초등학교를 둘러싼 모든 동네의 사람들이 모두 참가하는 총 운동회였다.
나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엄마와 누나 손을 붙잡고 운동회에 가서 경기도 구경하고, 천막에서 전도 먹었었다.
이번 운동회는 3박 4일 동안 열리며 그동안 열렸던 운동회보다 상금이 훨씬 좋다고 소문이 나서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이기려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엄마 엄마도 저기 나가?"
우리 엄마는 체구가 작지만 달리기가 무척 빨라서 누나 때부터 항상 크고 작은 학교 행사에서 달리기 부분 고정선수였다.
"그럼~! 우리 아들 딸이 다니는 학교인데 엄마가 나가서 달리기는 1등 해줘야지!"
"와!!"
나와 누나는 엄마가 달리기 시합에 주전으로 참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환호성을 질렀다.
보통 경기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 어머니들은 각 동네별로 모여있는 천막에서 음식이나 술을 준비했는데 작년엔 엄마가 발을 다쳐서 출전하지 못해 뒷구지 천막에서 전을 부쳐주셨었다.
이번에는 엄마가 선수로 직접 뛴다니 너무 기대됐다.
가을 운동회가 가까워 오자 마을 운동장은 점점 색을 가꾸며 옷을 입기 시작했다.
허허벌판에 축구골대만 덩그러니 놓여있던 운동장은 어느새 형형색색 만국기로 하늘을 덮었고, 그려진 지 오래되어 보이지 않던 트랙도 새로 그려졌다. 오랜만에 보는 운동장의 본모습이었다.
나는 학교 수업을 듣다가 운동장에서 경비 아저씨와 체육선생님 둘이서 트랙을 그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초록색으로 칠해진 바퀴 달린 기계 안에서 하얀색 분필가루가 덜커덕 덜커덕 거리며 지나가는 자리에 선을 그렸다. 경비아저씨는 앞에서 방향을 안내해 주는 체육선생님만 믿고 천천히 한 발자국씩 움직였다.
드디어 가을운동회 당일이 되었다.
며칠 전부터 각 동네 대표들과 선수진,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날짜별로 경기 일정을 공지해 주었고, 학교 운동장 앞에도 커다란 나무판에 대자보로 붙어있어 우리 경기가 언제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운동회를 하는 동안에는 학교 수업이 없었기 때문에 늦잠을 잘 수 있었지만 나와 누나는 엄마의 첫 경기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엄마는 운동회의 꽃이었던 이어달리기와 여자 100m 달리기도 출전한다고 했다.
이어달리기는 모두의 주목집중되는 경기라 항상 마지막날 치러졌고, 첫날 경기는 단거리 달리기였다.
엄마 차례는 앞순서라 조금 늦으면 못 볼 것 같아서 시간 맞춰 학교로 올라갔다.
학교에 가까워지자 조용하고 고즈넉했던 산속 초등학교는 요란한 풍악 소리와 꾕가리소리, 사람들의 환호소리로 가득했다.
학교 운동장 앞에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솜사탕 파는 아저씨, 아이스크림 파는 아저씨, 번데기와 어묵을 파는 아줌마, 여러 가지 장난감을 바닥에다가 깔아놓고 파는 아저씨까지 다양한 노점상 장사꾼들이 10명은 넘게 모여있었다.
하나하나 눈길이 가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조금 있으면 엄마의 경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보기로 하고 운동장 앞쪽으로 서둘로 발걸음을 옮겼다.
운동장은 이미 다른 경기가 펼쳐지고 있어서 옆으로 돌아가야 됐는데, 트랙 밖으로는 각 마을이름이 붙어 있는 천막들이 빼곡히 쳐져있어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저기 엄마다!!"
나보다 키가 컸던 누나가 먼저 엄마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어!!! 저기 엄마!!!!"
뒤늦게 엄마를 발견하고 나도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하지만 운동장은 조그마한 꼬마들의 소리가 저 멀리까지 닿지 않을 만큼 넓고 소란스러웠다.
바로 다음 차례로 뛸 준비를 위해 라인에 올라서는 엄마는 우리를 보지 못하셨다.
"야 빨리 뛰어봐!!!"
다급해진 누나가 엄마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빠르게 운동장 앞으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엄마!!! 엄마 파이팅!!!!!"
간절함이 엄마에게 닿았는지 엄마는 출발선에서 나와 누나가 뛰어가는 모습을 알아보시고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자~ 선수들 라인 앞에 서주시구요"
"카운트 세겠습니다."
"하나"
"둘"
"빵!!"
총성 소리와 함께 10명 남짓한 선수들이 일제히 결승선을 향해 맹렬히 달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아줌마들이었고, 젊은 학생도 두 명 정도 있었다.
출발 신호와 함께 달려가는 선수들 사이로 엄마도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다들 비슷하게 출발했으나, 몇 걸음 달려 나가고 나니 유독 한 선수가 치고 나가는 게 보였다.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작고 가벼운 몸을 무기로 빠르게 다리를 내딛으며 달렸는데, 얼마나 빨랐는지 엄마의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결과는 당연히 엄마의 우승이었다.
엄마가 1등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나와 누나는 방방 뛰며 엄마에게 달려갔고, 엄마와 누나 그리고 나는 서로 부퉁 켜 안으며 승리를 만끽했다.
동시에 우리 뒤쪽으로 엄청난 환호송이 들려 돌아보니 뒷구지라고 써져 있는 천막에서 이미 한잔씩 하고 있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엄마의 경기소식을 듣고 다 같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가을 운동회는 나에게 조금 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바로 시내 마을로 초등학교를 가버린 창민이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창민이와 창민이 누나는 대곡초등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뒷구지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가을 운동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작년에도 창민이와 운동장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하고, 경기도 즐기고 우리 동네 천막에서 엄마가 만들어주시는 전을 먹으며 재미있게 보내서 올해에도 창민이와 즐겁게 놀 생각에 며칠 전부터 설레었다.
엄마의 오전경기를 보고 나와 누나는 우리 동네 천막 쪽에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만들어주시는 전과 찌개를 먹으며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야! 오랜만이다!"
창민이었다.
옆을 보니 창민이의 누나도 함께였다.
"오 왔어!? 밥 먹자 얼른 와"
누나는 문정이 누나를 보고 반가워서 같이 밥을 먹자며 이쪽으로 와서 앉으라며 손짓했다.
누나들이 한창 이런저런 이야기로 바쁠 때 나와 창민이는 밥을 대충 먹고 먼저 일어났다.
"우리 먼저 갈게~"
천막에서 밥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기엔 구경거리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가장 먼저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운동장 입구 쪽에 들어와 있는 노점상골목이었다.
밥을 먹고 다시 가보니 아침에 왔을 때보다 더 많은 노점상들이 들어와 있었고, 골목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미 우리 나이또래 아이들이 간식을 사 먹거나 장난감을 구경하기 위해 잔뜩 모여있었고 나와 창민이도 노점상을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실컷 구경했다.
나와 창민이는 일 년 만에 만났는데도 서로 잘 지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와 같은 안부는 묻지 않았다.
어제 만났던 친구처럼 그냥 같이 다니며 즐길 뿐이었다.
정신없이 운동장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운동회 첫날이 끝나가고 있었다.
누나들은 아까부터 보이지 않았는데 어디론가 가버린 것 같았다.
아마 창민이네 집에 간 게 틀림없었다.
창민이네 엄마 아빠는 일 때문에 타 지역에 가셔서 할머니 혼자 사셨는데, 가끔 우리가 만나는 날이면 다 같이 창민이네 집에 놀러 가서 밤새도록 할머니와 같이 놀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게 바로 오늘 같은 운동회 날이었고, 누나는 분명 벌써 창민이네 집에 간 게 틀림없었다.
나도 끝나가는 운동회를 뒤로한 채 창민이네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창민이네 집으로 들어가니 역시나 신발장에는 익숙한 누나의 신발이 놓여있었다.
"오늘도 고스톱 한판?"
"조오~~ 취!"
창민이네 집에서 잘 때는 항상 하는 게임이 있었는데 창민이 할머니가 가르쳐주시는 고스톱이었다.
할머니는 돈을 걸고 하진 않았지만 뭐라도 걸지 않으면 재미없다며 항상 바둑알을 10개씩 나눠주셨고,
우리가 알기 쉽게 하나하나 잘 설명해 주셨다.
할머니는 늘 적적해하시다가 우리가 놀러 가면 기분이 좋으신지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셨는데 무엇보다 고스톱을 칠 때 가장 행복해 보이셨다. 나도 다 같이 치는 고스톱이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점점 익숙해지고 규칙을 알아가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에 집중했다.
그렇게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온정을 느끼며 운동회를 핑계 삼아 다 같이 한 이불을 덮고 잠에 들었다.
운동회는 둘째 날을 지나고 마지막 날이 되었다.
엄마는 100m 달리기 1등을 해서 이미 우리 동네를 넘어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도 유명해져 있었다.
엄마가 지나갈 때면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하셨다.
"그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스피드가 나와요?"
"아이고~ 진짜 빠르시데요"
"와 뒷구지 뜀박질 선수다!"
"경기 잘 봤어요~~ 멋지세요!! 짱짱!!"
엄마 옆에 바짝 붙어서 걷는 나는 그런 엄마가 자랑스럽고 멋졌다.
운동회 마지막 날엔 이어달리기와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참가하실 수 있는 상품 추천 코너가 있었다.
학생들과 부모님들, 연세가 많으신 분들도 모두 참여하는 운동회이기에 상품들도 전 연령을 막론하는 수건이나 치약이 보편적이었다.
운동회 마지막 날이라 여러 동네 사람들이 모두 집중하며 서로의 스코어를 계산하고 1등을 할 수 있는지, 2등이라도 할 수 있는지 예측하기 시작했다. 마지막날 펼쳐지는 이어달리기는 단체적 경기로 전체 경기 중 점수가 가장 높아서 3등, 4등 하던 동네도 여기서 1등을 하면 금세 1등을 할 수 있는 막판 뒤집기가 가능했다.
그래서인지 모두 이어달리기 경기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경기장은 트랙을 제외하고 사람들로 빼곡하게 가득 둘러싸여 있었다.
이어달리기는 동네별로 총 4명에서 출전하는데 남자 2명, 여자 2명 그리고 아이 1명 어른 1명 이런 식으로 조건이 붙어있었다. 우리 동네는 키가 큰 영서형과 성현이네 아저씨, 지혜누나와 우리 엄마 이렇게 4명이서 출전했다. 경기 시작 전에는 100m 달리기 여자 1등을 한 우리 엄마가 있는 것을 보고는 여러 사람들이 이어달리기는 뒷구지에서 따놓은 당산이라고 말을 많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어달리기는 우리가 2등을 했고, 1등은 대장동팀이 했다. 처음 시작과 끝을 남자 선수로 놓고 중간에 여자 선수를 배치했는데 남자 선수들이 어찌나 빠르던지 첫 시작부터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가 벌어졌었다. 우리 엄마도 정말 빠른 속도로 달렸지만 대장동 선수들에 비해서는 조금 부족했던 것 같았다.
이어달리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동장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수영장 모양의 종이 천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는 수백 개의 선물 상자들로 채워졌는데 처음엔 이게 뭐지!? 싶어서 신기함에 계속 쳐다보았다.
"자~ 이제 우리 가을운동회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각 마을에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모두 앞으로 나와주세요~"
운동회 진행자의 방송에 맞춰 각 마을 천막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앞다투어 천천히 걸어 나오셨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도 운동장 앞으로 나가셨다.
앞으로 나간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기다란 낚싯대 같은 것을 나눠주었는데, 알고 보니 낚싯대에는 기다란 실에 자석이 붙어있었고 운동장 가운데에 쌓여있던 선물들에는 하나하나 자석이 붙어있어 낚싯대로 상품을 낚는 방식이었다.
운동장 앞에 모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상품에서부터 일정거리 떨어져 있는 선 앞에 서서 쉴 새 없이 낚싯대를 휘휘 저어가며 상품을 골라냈다.
낚시 게임은 운동회의 보너스 게임 같은 순서로 대부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상품을 4,5개씩 받으실 수 있었고, 흡족해하시는 표정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성대했던 가을운동회는 그렇게 막이 내렸다.
운동장을 가득 메웠던 각 천막들도 하나둘 철거되었고, 운동장 앞에 들어왔던 노점상 장사꾼들도 하나둘 정리하며 자리를 떠났다. 오랜만에 형형색색 치장을 했던 운동장도 현수막이며, 만국기며 원래대로 정리되고 정돈되었다.
나는 직접 경기를 뛰진 않았지만 언제나 산속에서 조용하고 고즈넉했던 우리 학교가 이렇게나 에너지 넘치고 시끌벅적한 상황을 너무나도 즐겁게 즐겼고, 일 년에 한 번 창민이와 만나 같이 놀 수 있음에 감사했다.
운동회가 끝나고 집에 들어와 보니 화장실엔 같은 종류의 치약이 한가득, 그리고 새 수건들로 가득 차있었다.
수건엔 모두 같은 이름의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대곡초등학교 가을운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