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이는 물결
어제는 온종일 눈이 내렸다. 엊그제만 해도 하늘을 가득 메웠던 하얀 구름은 한 점 없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내린 눈이 무색할 정도로 맑게 갰다. 오늘은 기필코 마음껏 바다를 보아야지. 급하게 끼니를 때우고 밖에 나갔다.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에는 나와 몇 마리의 갈매기를 빼면 아무도 없었다.
파도가 부단히 밀려오고 있었다. 어느 파도는 먼발치에서 부서졌고, 어느 파도는 내가 서 있는 곳 바로 앞까지 오곤 했다. 파도가 다가오는 소리, 부서지는 소리, 다시 바다로 물결이 돌아가는 소리가 내 귓가를 가득 메웠다. 세상에 혼자 남겨지면 이런 느낌이려나. 멍하니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떤 파도가 맹렬하게 다가오더니, 내 신발을 적셨다. 내 주변에서 땅에 부리를 박고 먹이를 찾던 갈매기도 차가운 바닷물이 발치에 닿았는지, 이내 날아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이러다 옷까지 바닷물에 젖겠다 싶어 몇 발짝을 뒤로 물렸다. 한참을 서 있어서 그랬을까, 내가 서 있던 곳의 모래는 내 신발 밑창 모양으로 깊게 패 있었다.
나는 발자국을 빤히 바라보았다. 얼마 후 무심한 파도가 다시 밀려왔고, 발자국 위를 훑은 뒤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발자국은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발자국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바닷물에 젖은 모래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괜스레 심술이 나서 몇 번을 더 발자국을 새겼다. 일부러 깊이 패도록 발뒤꿈치에 힘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파도는 한 번도 빠짐없이 내 발자국을 모두 지웠다. 이번에는 근처에 있던 돌멩이를 하나 집어 던졌다. 파도는 그마저도 삼켜 바다로 돌아갔고, 돌멩이가 떨어진 자리는 마찬가지로 젖은 모래가 다시 채웠다.
얼마나 많은 흔적들이 이곳에서 지워졌을까, 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파도가 돌아간 자리에 있던 젖은 모래들이 금세 마르는 것이 보였다. 파도가 돌아가고 얼마 안 있어 모래에 스미었던 물기가 다시 바다로 돌아간 듯 보였다. 젖었던 짙은 황갈색의 모래는 금세 다시 뿌연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파도가 닿지 않는 쪽의 모래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파도와 모래사장은 마치 서로를 지우려 애쓰는 것 같았다. 얕은 발자국도, 깊은 발자국도, 돌멩이도, 파도에 젖은 모래도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무언가 모를 안타까운 감정이 생겼다. 이건 마치 나와 닮았다.
나도 하루에 몇 번이나 슬프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쓰곤 한다. 마치 모래사장을 뒤덮는 파도처럼. 나는 그것들이 머무를 틈을 주지 않으려 한다. 언젠가 나를 좀먹고 잠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었던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남는 경우가 꽤 있다. 아마 모랫바닥 깊은 곳에는 물기가 남아있을 것처럼. 간혹 드는 영문 모를 우울감이 혹시 그런 것 때문일까. 무엇이 더 나를 위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처음 남긴 그 발자국이 파도에 지워졌을 때 들었던 묘한 서운함이 그 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먼 바닷가를 바라보기만 했다. 바닷물에 발목이 다 잠기고 나서야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