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씨 성을 가진 같은 반 남자아이에게 초콜릿을 주던 날이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산 300원짜리 가나 초콜릿. 직접 전해 주기가 너무 부끄러워 옆에 있던 같은 반 여자아이에게 부탁했다. 그 친구는 학교 현관에서 얼른 신발을 갈아 신고, 신발주머니를 흔들며 황 씨에게 뛰어갔다. 나는 들킬세라 벽 뒤로 돌아가 훔쳐보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으아~~~"
순간 얼굴이 고구마가 되어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나의 첫 밸런타인데이였다.
인생의 설렘은 생각보다 그리 자주 오지 않았다.
서른이 다 되어갈 때쯤 만난 남편과 결혼하고, 오만가지 허례허식을 곁들인 결혼식장에 들어서던 그 순간!
그리고 신비로우면서도 힘든 임신의 기간을 거쳐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의 이목구비를 확인하며, 그 아이의 순수하고, 결백한 얼굴에 나의 때 묻은 얼굴을 조심스레 비벼보는 순간!
"설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금 우리 집에는 설렘이 사라졌다.
온통 쌓인 설거지와 빨래들.
사방에 널려 내 발바닥을 쿡쿡 찌르는 오색빛깔의 장난감들.
그리고 쉴 새 없이 들리는 울음소리와 웃음소리.
설렘은 개뿔.
침대에 누워 잠이라도 실컷 자보고 싶다.
그 생각을 하니 설렌다. 아이들 없이, 혼자 큰 침대에서 오롯이 혼자 잠을 자는 생각!!!
사회의 불만과 사람들을 향한 불안으로 가득 찼던 나의 20대.
그때 최대의 관심사이자 목표는 결혼이었다. 나는 그 목표를 이루었다. 그런데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을까.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놀이터 가고, 낮잠 재우고...
다시 먹이고, 놀이터 가고, 씻기고, 재우고... 지금이 몇 시인지, 오늘이 며칠인지는 잊어버린 채 아이가 잠이 든 시간과 아이가 밥 먹은 시간으로 나의 하루는 기억된다.
그네도 하나 없는 아파트 놀이터를 하루 두 탕씩 뛰다가, 맞은편에서 빨간 휴대용 유모차를 흔들어 재끼고 있는 아주머니를 보게 되었다. 아주머니 주위에는 서너 살, 그리고 대여섯 살로 보이는 두 아들이 놀이터를 누비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유모차를 거칠게 흔들며 슬픔 반, 절규 반에 가까운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지만, 정작 듣는 이 없이 허공에 흩어졌다. 보고 있는 내가 더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집에 와서 아주머니의 모습이 자꾸 스쳐간다. 잔뜩 찌부러진 아주머니의 슬픈 얼굴이 조금만 건드려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뭐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나셨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 내 모습도 저렇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친 듯이 화를 낼 때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놀이터에서 아이의 체력을 실컷 빼고는 집으로 돌아와 막 낮잠에 들기 시작한 아이의 옆에 누웠다.
참~ 평화로운 얼굴이다.
아이의 세상은 평화롭다. 편안하다.
무엇이 이 아이에게 이렇게 달콤한 세상을 주었을까?
...
그것은
바로 "엄마"라는 존재겠지.
옆에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겠지...
아이가 잠든 틈에 화장실만 다녀오려고 해도 빈자리를 귀신같이 알고, 눈을 딱 떠버리는 아이다.
이 아이에게 엄마는 세상의 전부이자, 세상의 평화다.
아이에게 나는, 내 이름 세 글자는 세상의 전부이자, 평화인 것이다.
낮잠을 시원하게 자고 일어난 아이는 짧고, 통통한 앙증맞은 팔을 내게 뻗으며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안아달라는 사인이다.
나는 상체를 깊이 숙여 두 가슴을 맞닿는다. 그러면 아이는 짧은 팔로 내 목을 힘껏 끌어당겨 볼을 실컷 비빈다.
그 작고 탱탱한 볼의 기습 공격.
안경을 벗을 틈도 없이 당해버렸다. 그 작고 작은 몸으로 온 힘을 다해 나를 안아주는 아이의 품 안에서... 나는 우습게도 눈물이 나고 말았다.
보조개 공주님
그 아이의 가슴에서 나는 뜨거운 무엇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게 한참을 있기에는 나의 고질병인 목디스크 + 집안일이 너무 많았다.
"이제 그만, 손 놔줘~ 엄마 힘들어~"
감동과 동시에 짜증이 느껴지는 희한한 순간이었다.
엄마로서의 삶은 외롭고, 힘들다.
끝나지 않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많은 책임이 엄마에게 있다. 얼른 밀린 일을 해치우려고 무릎을 짚고 일어나는데, 아이의 2차 공격이 들어왔다.
"난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엄마는 최고야!"
나는 K.O를 당한 선수 마냥 바닥에 두 무릎을 꿇어 아이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너무나 고마운 사람, 내가 주는 것만큼이나 나에게 사랑을 돌려주는 아이.
세상에 길이 남을 만한 일은커녕, 소소한 꿈조차 이뤄보지 못한 내게... 이 아이는 아무런 기준 없이 나를 "최고의 엄마"로 만들어 주었다. 그저 아이를 봐주고, 먹여준 일, 잠깐씩 놀아준 일, 부모로서 당연한 그 일들이 아이에게는 최고라 생각되었나 보다. 아니면 아이 스스로도 엄마에게 "위로 혹은 칭찬"이라는 보답을 주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오늘보다는 조금 더 좋은 엄마가 되어보자고 다짐을 해본다. 그냥 엄마가 아니라 "너의 유일한 엄마"로써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너를 안아주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