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2잔의 커피를 마셔버린 터라 또 마시기엔 부담이 되어, 밍밍하고 심심한 게 매력인 공차로 향했다. 쫀득쫀득한 펄 추가는떨어진소화력과꾸준한 치과방문으로과감하게 포기한 지 꽤 됐고, 이제는 좀 더 부드럽고 고소한 코코넛 토핑으로 대신한다. 고르는 재미 덕분인지 아이들은 학교 후 떡볶이 가게 마냥 공차로 들이닥친다.곧 시끌벅적해질 예정이라 나는 코너 구석에 있는 아주 작은 1인용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10여분 지났을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무리를 지어 삼삼오오들어온다. 긴 생머리에 얼굴은 허옇고 입술은 뻘건 여학생 4명이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마치 머털도사가 도술을 부려 분신술을 부린 양, 다 똑같이 생겼다. 얼굴이 정말 똑같은 건지, 형태만 똑같은 건지 살필 수는 없었지만 개성 강한 말투와 목소리는 다행히 구별이 되었다.쉴 새 없이 깔깔거리던 여학생들은 곧바로 쌍시옷의 폭격을 시작했다.'아... 귀가 또 힘들겠구나...'
나이를 불문하고, 욕설이 심한 학생들이 많아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매번 가방에 달려 있던 무선이어폰이 없다! 이깟 이어폰 때문에 멍청한 나 자신을 저주할 지경이다. 깔깔거리는 여자 아이들의 매서운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전쟁터에서 총알처럼 욕들이 오고 간다. 저 욕들은 쏘는 사람은 있어도 맞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아니, 사정거리에 있지도 않은 내가 맞고 있는 기분다. 그런데 저 전쟁통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들었다. "사랑"
"지랄, 그니까 니 머리랑 마음이랑 따로 따로라는 거잖아~"
"아 그러니까 씨발~나도 모르겠다고~"
저 귀엽고 예쁘장한 얼굴로 생긋생긋 웃으며 쌍시옷을 쏴버리는 얼굴은 아직도 이상하다. 귀엽고도 무서운 저 아이들은앵두 같은 입술을 오물거리며-거칠게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결국은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것 같다는 가십거리들이다.사랑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울고, 웃는 저 아이들을 보니 풋풋한 나이는 속일 수가 없나 보다.
사랑.
사랑... 문득 어젯밤 잠자리가 떠오른다.
편하게 대자로 누워 자고 싶지만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아이들 때문에 편히 잘 수가 없다. 남편도 물리치고 확보한 넓은 자리였는데 결국 세 아이들이 돌아가며 하루씩 자고 가는 하숙방이 되었다. 어제는 둘째의 순번이었다. 세 남매로 항상 엄마의 사랑을 차지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는 오롯이 엄마를 차지할 수 있는 날이었다.
"우와~ 오늘은 내가 엄마랑 같이 자는 날이다!"
세상 신난 아이가 꿉꿉하게 냄새가 밴 자기 베개를 들고 침대로 왔다. 귀찮지만 사랑스럽고, 불편하지만 행복한 이 잠자리.
아이의 부드러운 얼굴을 나도 모르게 계속 쓰다듬고 있다.
아이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본능이며, 수익이 남지 않는 손해 보는 장사, 즉 일방적으로 주는 일이 더 많은사랑이다. 그것은 사람뿐 아니라 말 못 하는 동물들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들의 모성애과 부성애는 사람이 보아도 마음이 시큰하게 시릴 정도로 애틋하고 강력하다.
그러다 문득 건넌방에 있는 남편이 생각났다. 내 옆에 있는 아이에게는 이렇게 무한한 사랑을 퍼줄 수 있는데, 저 건넌방에 있는 남편에게는 왜 자꾸 대차대조표를 작성하고 계산기를 두드리는지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마이너스가 난 상황이라면 나는 지체 없이 화를 내고 조목조목 요구목록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남편이란 존재도 내가 사랑이란 감정으로 선택한 사람인데... 왜 아이한테 하듯 대가 없이, 바람 없이 그저 사랑할 수가 없을까. 먹는 "배"와 타는 "배"는 같은 말이지만 의미가 다르고, "사랑"이라는 말은 이 것도 사랑, 저 것도 사랑인 같은 의미임에도 나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는 걸까
조잘거리던 아이의 입이 어느새 다물어지고, 모든 힘이 빠진 채 고요해진 아이의 얼굴에 입을 맞추어 본다. 미안함과 고마움, 짜증과 기쁨의 모든 감정을 내 입술에 담아 격하게 쏟아부었다. 아이는 그저 잠을 자고 있다. 아이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그렇게 오늘의 고해성사를 마쳤다. 그리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웠다.
옆에 있는 이 아이는 어떤 실수를 해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 사랑해야만 할 의무가 있는데... 저 건넌방에 있는 남편에게는 왜 똑같은 사랑의 굴레를 씌우지 못하는가. 그가 나에게 실수를 한 것은 절대 잊히지 않는 주홍글씨가 되어 나를 옭아매는데...
뜻이 같은 두 사랑은 어디서부터 갈라진 걸까.
"남편" 혹은 "남자"
남편(남자)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때에야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다.
자상하게 나를 챙겨줄 때, 살림을 도와줄 때,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줄 때... 그럴 때 나의 감정은 더 커졌다. 반대로 그렇지 않을 때는 남편을 향한 감정이 줄어들고, 어느 때는 아예 소멸됐다.
그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 자체를 사랑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 마이 갓...
그동안 내가 한 사랑은 무엇이었나...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무엇이었나...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캄캄한 방 안에 누운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사랑"했던가? 사람을 "사랑"한 적이 있던가?...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을 돌이켜보니 나는 그 사람들이 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쥐어준 순간 결별을 고했었다.나는 그것이 좋은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이 밤에 갑자기 나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식이라는 본능적 사랑 이외에 어떤 이성도 사랑해 본 적 없었다. 나는 오로지 그들의 역할을 사랑한 거다.
나는, 결코 어떤 누구도 감히 사랑할 수 없다.
그럴 주제가 못 되는 사람이 바로 나다. 내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그것은 너무 편협하고, 작았다.
상대의 이름 석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아이들이 실수를 하고, 미운 말을 던져도 반나절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사랑"이-
이성에게는, 또 남자에게는 절대로 이윤이 남지 않는 거래는 하지 않는 것이 내가 말하는 사랑이었다.
그러니 지금 남편이 아니라 다른 결의 남편을 만나 재혼을 한다 해도 내 미래는 불 보듯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