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이 보였다가 행거에 걸린 야리야리하고 알록달록한 옷들이 번갈아 숨바꼭질을 한다. 마음에 든다 싶어 뒤돌아보면 벌써 다른 옷들 사이에 꼭꼭 숨어버렸다. 아쉬우면서도 다행인 순간이다.
다시 눈에 띄었다면 그 옷을 입어보았을 테고, 입어보았다가는 기어이 "나를 위한 선물"이라는 포장지에 싸인 죄책감을 손에 들고 나왔을 것이다.
걷고 또 걷다가 유리창에 반사된 내 바다라인을 본다.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빠른 걸음으로 그늘이 드리워진 쇼윈도를 찾아 걷는다.
'아~다리가 좀 길었으면 좋겠는데... 왜 아빠를 닮아가지고'
쇼윈도 안의 상품을 보는 척하며 이래저래 몸을 훑어보아도 역시나 아쉬운 몸이다.
'뭐 이렇게 태어난걸 어찌하겠나~ 이 비루한 몸을 감싸줄 예쁜 옷을 또 찾아봐야지'
하며 내 뒤로 지나가는 이의 모습을 슬쩍 쳐다본다.
'에이~역시 짧네, 내 다리'
쇼윈도를 보며 걷는 일은 이래저래 재미있다.
미운 내 모습도 자꾸만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쇼윈도의 상품을 보는 건지, 내 생김새를 살피는 건지 알 수 없이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간다. 온통 정신이 팔려 유리창을 따라 걷다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따가운 직사광선에 반사된 유리창에 인상을 찌푸리며 머릿속의 흐름도 끈겼다. 뜨거운 햇살이 정통으로 유리창을 비추는 탓에 매장 안의 상품도, 내 보디라인도 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햇볕이 얼마나 뜨겁게 쬐이는지... 매장 안쪽은 상품이 망가지지 않도록 어두컴컴한 블라인드를 바닥까지 내려놨다.'햇빛 때문에 쇼윈도가 쇼윈도 역할을 못하는구나, 저긴 차라리 벽이었어야 했어'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터덜터덜 발을 옮겼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물건을 보관해 본 사람은 알 거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빛이 하루 이틀이 지나 일 년 이 년이 넘어가는 순간- 제 빛을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직사광선에 노출된 물건들은 저마다의 색깔이 휘발되어 히뿌연 자국만 남을 뿐. 여기저기 부식되어 손끝만 스쳐도 이내 부스러진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물건도 직사광선 아래에서는 상품의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린다. 그러니 햇볕이 바로 쬐이는 곳이라면 화분을 제외한 어떤 물건도 놓지 않는 게 상책.
직사광선.
빛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사람에게까지 나아간다. 사람에게도 빛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연을 만나면 서로에게 강렬한 직사광선을 보낸다. 그 빛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줄 모르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타들어갈 듯이 강렬하게 비추었다. 처음 그 빛은 아름답고, 고귀하고, 영원하리만큼 서로를 빛나게 해 줄 줄 알았다. 하루 이틀, 일 년 이년이 지나고 나면서 그 빛은 마치 직사광선 아래 쇼윈도의 물건들처럼 해를 입었다. 서로에 의해 색을 잃고, 변질되었다. 여타의 물건들이 그랬듯 우리는 서서히 바래고, 부식되기 시작했다. 빨강이었는지, 노랑이었는지, 파랑이었는지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긴 시간 부식되어 우수수 가루가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서로 마주하지 않은...
그러니까 서로의 직사광선이 닿지 않은 우리의 그늘엔 아직도 본연의 색이 있다. 타인들은 우리의 바래진 모습이 아닌 그늘을 본다. 바래지 않고, 부식되지 않은 온전한 "나"를 본다. "나"의 색깔을 보며, "나"의 형태를 본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온전한 "나"를 본다.
나의 빛으로 손상되지 않은 당신의그늘을 다시 보고 싶다.
나의 빛으로 인해, 나의 욕심으로 인해, 당신을 소유함으로 인해 바래지고 부식된 우리가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써 온전한 당신을 바라보고 싶다. 서로를 비추던 강렬한 빛을 거두고, 내 발아래 딱 한 걸음만 비추어 서로의 빛으로 바래지 않고, 부식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