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사랑의 온도

by 눈부신 일상
사랑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진한 사랑일수록 그 그림자도 짙다는 사실을,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사랑도 시간 속에 스러진다는 것을, 설령 사랑이 변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사람이 변하고 만다는 것을
- <언어의 온도> 중에서 -


여느 때보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이어지는 겨울이다. 요즘 내 마음도 이유를 알 수 없이 요란하다. 매일 고요하고 잔잔한 새벽을 통해 넘실대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근근이 버틸 에너지를 얻는다.


그날도 어둠 속에서 고요한 하루를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몸 상태를 직감적으로 느꼈지만, 욕심을 내며 억지로 책상에 앉았다. 하루를 버틸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늘 자연스러운 몸의 움직임이 이어지는 시간인데, 유난히 손길이 무겁고 느리다. 결국, 다시 잠을 청했다.


날이 밝아오자 아이들이 일어나서 엄마의 손길을 찾는다. ‘엄마’의 사랑이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대충 식탁에 먹을 것을 챙겨주고 다시 의자에 몸을 눕혔다. 발밑에 족욕기로 몸을 데우며 담요를 덮는다. 잠도 오지 않고 하릴없이 드라마를 틀었다. 평소 드라마를 보지 않지만, 가끔 식사 준비를 하면서 흘려보곤 한다. 그렇게 몇 개월째 느리게 보는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틀었다.


북한 고위급 간부의 아들인 남자 주인공과 남한 재벌의 딸이자 기업의 대표인 여주인공의 애절한 사랑이 담긴 드라마이다. 두 주인공의 애절한 눈빛과 애타는 목소리에 멍하게 보고 있던 내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흐른다. 마지막 회까지 오면서 애잔한 장면도 많았는데, 아무런 감흥 없이 무덤덤하게 지켜보았다. 특별한 것 없는 장면에서 흐르는 눈물에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르르 흐른 한 방울의 눈물은 몇 장의 휴지 뭉치를 쌓이게 했다. 그리고 당황스러운 휴지 뭉치를 쳐다보며, 드라마의 결말보다 휴지 뭉치의 근원이 더 궁금해졌다.


분명 몸이 힘든 것이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몸이 아프면 마음마저 나약해지기 마련이니깐. 하지만 치명적인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수북이 쌓인 휴지의 원인을 나른한 몸에 대입하기에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슬픔이라는 흐릿한 거울은 기쁨이라는 투명한 유리보다 '나'를 솔직하게 비춰준다”라니, 슬픔의 거울 속에 비치는 나를 조심스럽게 응시한다.


‘나도 저런 마음으로 사랑했을 때가 있었는데… 그 마음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수면 위로 수줍게 떠 오른 나를 마주한다. 문뜩 내 기억 속에 남겨진 흐릿한 내가 무척 그리워진다. 처음 이성을 좋아하는 감정을 느낀 수줍은 10대가 스친다. 차마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몰래 그 아이를 지켜보던 콩닥거리는 가슴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둘이 함께하는 모든 것이 좋았던 20대가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없고 한심하게 느껴지지만, 앞뒤 재지 않고 마냥 즐거운 웃음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한 남자의 여자,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의 내가 보인다. 더 이상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설레고 떨리는 사랑은 없다. 지금 이 순간에 푹 빠져서 마음껏 즐기고 웃을 수 있는 대범한 사랑도 없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잃어버린 사랑의 온도가 사무치게 그리웠고, 그 아쉬움이 눈물로 터져 나온 것이다. 뜨거운 사랑의 온도를 잃고, 차갑게 굳어버린 것 같은 내 마음의 온도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다행히 수북이 쌓여가는 휴지뭉치가 몸과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한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에 따사로운 온기가 느껴진다. 사랑을 잃은 것이 아니라 변한 것이라는 생각이 잔잔하게 퍼진다. 설령 사랑이 변하지 않았더라도 그 사랑을 키우는 내가 변하지 않았는가! 젊은 날의 뜨거움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24시간을 살아갈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랑은 지극히 내가 중심이었고, 내 감정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바라보는 깊고 넓은 사랑이 필요하다. 그동안 다양한 변화를 겪으며 한결 성숙해진 삶에 다른 온도의 사랑이 느껴진다. 사랑은 한결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소멸하거나 쇠퇴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 지난 사랑을 그리워하며 눈물지을 수 있기에, 지금 함께하는 사랑도 용기 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희생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에 뜨거운 눈물이 흘렸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의 낡은 가죽 수첩 속의 꾹꾹 눌러쓴 사랑에 또다시 눈시울을 붉힌다. “하루를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로 받아들이기로 했지. 그리고 다른 건 다 잊어도 아내 생일과 결혼기념일 같은 소중한 것은 잊지 않으려 하네..”라는 어르신의 사랑에 더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드라마 속의 눈물은 아련한 그리움이었다면, 지금의 눈물은 앞으로 내가 가꾸고 싶은, 가꾸어야 할 사랑의 모습이다. 내 삶의 변화에 한 발 한 발 보조 맞춰가는 사랑 그리고 한 발짝 뒤에서 묵묵히 걷는 사랑도 애틋하고 충분히 아름답다.


삶과 사랑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슬로 푸드’이다. 뜨거운 열기보다 잔잔한 따사로움이 더 길고 깊은 생명력을 가질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 글아, 날개를 달고 세상 속에 훨훨 날아가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