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라 그래>를 읽고
살아온 하루하루가 쌓여 사람마다 꺾이는 각도가 달라진다.
<그러라 그래> 중에서
거실 큰 창 아래 테이블을 두었다. 창을 등진 자리는 세 아이를 바라보며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쓰기 딱 좋다. 창밖을 볼 수 없지만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의 변화에 따라 계절의 변화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짧고 굵던 여름 햇살이 한결 부드럽게 거실 깊숙한 곳까지 비추기 시작했다. 가을이다. 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가 드러나는 모습을 상상하니 부쩍 늘어난 흰머리와 줄은 머리숱이 떠올라 깊은 한숨이 나온다.
회사 동료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첫 만남의 날, 비가 많이 내렸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나는 차량 정체를 피해 지하철을 탔고 남편은 편안한 이동을 위해 자동차를 가지고 나왔다. 비 오는 날 종로 한복판에 차를 가지고 나온 사람은 1시간이나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근처에 큰 서점이 있기 때문에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구경했다. 인연이 되고자 했나 보다. 낯선 두 사람은 연인으로 1년, 신혼부부로 1년, 부모로 12년을 함께 살고 있다.
사계절을 함께 보내야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있다며 결혼 전 꼬박 1년을 만났다. 우둔한 판단이었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사이가 되었음에도 이해받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삶이 이어졌다. 한 공간에 두 계절이 공존하는 것처럼 굴절된 모습은 달랐다. 사람마다 일상 속에서 겪는 일이 다르고 비슷한 경험이라도 느낌과 깨달음은 각자의 삶을 다르게 비추었다. 물속에 들어 있는 물체는 물 밖의 모습을 왜곡하는 것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식탁에 맥주 캔이 놓여있는 날이 늘어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남편은 원래 야생성이라 밤늦게까지 할 일을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침부터 널브러진 식탁을 치워야 하는 것에 짜증이 났다. 어느 날 심각한 표정으로 잠이 안 와서 맥주를 마신다고 했다. 남편은 해외기업의 한국 지사에서 일을 한다. 본사와 시차 때문에 자정이 넘도록 본사 동료와 미팅을 하는 날이 많다.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면 잠잘 시간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고, 최근 여러 가지 고민들로 인해 더욱 잠자는 것이 힘들었다고 한다. 곪은 상처가 터진 느낌이었다. 상처가 터지니 쓰라리고 아프지만 이제라도 터질 수 있어서 다행이다. 갑자기 부모님이 뒷모습이 작고 힘없어 보이듯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남편이 너무 힘겨워보였다. 다툰 시간만큼 우리는 늙었가고 있었다.
힘든 시간은 타인을 향한 시선을 조금씩 변하게 했다. 내 상처 덕분에 그의 상처를 살펴볼 수 있게 꺾일 수 있다니 투닥거린 삶이 헛되지 않았다. 숱한 갈등을 통해 한 사람의 존재를 조금씩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었다.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빛의 각도가 계절에 따라 변하듯, 수십 번의 계절의 변화 속에 삶을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타인을 원망하고 책망만 했는데 살짝 꺾어 상황을 바라보자 그 사람의 아픔과 상처가 보이기 시작했다. 각자 삶을 옥죄는 숨은 상처가 느껴졌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이유로 아픔을 숨기는 것만 애썼을지도 모르겠다. 자주 털어내면 먼지처럼 가볍고 아무것도 아닌 상처인데. 사람이 만나고 부부의 인연을 맺는 것은 어쩌면 운이나 타이밍일 수 있지만, 정성은 나의 몫이다.
부부의 인연도 가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거실을 비추는 부드러운 햇살처럼 서로의 삶을 깊이 어루만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떨어지는 잎새에 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