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고르는 가을

<공부의 미래>를 읽고

by 눈부신 일상
“제주 해녀학교에서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숨 길이를 아는 법입니다. 해녀에게 가장 위험한 상황은 바닷속에서 바위에 붙어 있는 값나가는 해산물을 발견할 때입니다. 조금 더 작업하려는 욕심이 생겨 물 밖으로 나가야 할 때를 놓치면, 금세 생명이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해녀학교에서 제일 먼저 자신의 숨 길이를 알도록 가르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숨 길이는 타고나는 것이어서 해녀 경력이 쌓이고 노력한다고 하군 해녀가 상군 해녀가 되지는 않습니다.”

- 공부의 미래. 164p-


가을이면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이나 바닥을 나뒹구는 바짝 마른 잎만 보였다. 꺼지는 불을 보는 것처럼 처량하고 쓸쓸했다. 운동을 다녀오는 길 초록 나무 사이에 샛노랗게 물든 나루 한 그루가 아침을 밝힌다. 반짝임의 잔상이 오랫동안 남아 하루 종일 아파트 곳곳에 단풍이 물든 나무를 비춘다. 알록달록 물들어가는 가을은 처음이다. 가을도 봄만큼 눈부시고 생명력이 넘치는 매력 넘치는 계절이었다.


여린 새순을 품은 봄은 꿈을 피우고, 푸르른 녹음을 드리우는 여름에는 힘차게 달려가다 보면 단풍이 물드는 가을을 만나 지나온 발걸음을 돌아보게 된다. 빙빙 맴돌다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음, 취기 때문인지 갈지자로 비틀거린 걸음 그리고 쭉쭉 뻗어가는 힘찬 걸음 등을 더듬어보면 지나간 많은 순간이 떠오른다. 우연히 시작한 운동으로 바닥에 추락한 삶을 세웠다. 매일 책을 읽었고 감사 일기를 꼬박 천일이나 썼다. 함께 글을 쓰고 나누는 시간도 1년이나 쌓였다. 모든 시작에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 난잡하게 찍힌 발걸음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니 이제야 모든 걸음에 작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뿐이다.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에서 ‘점을 연결하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래를 내다보며 현재의 점을 연결할 수 없다고 한다. 오직 뒤를 돌아보며 연결할 수밖에 없으니 점이 어떻게든 미래에 연결되리라고 믿어야 한다고 했다. 오늘도 열심히 점을 찍고 있지만 여전히 초조하고 불안하다.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미리 알 수 없으니 수 없는 많은 점은 답답함만 더한다. 어떻게 해야 무한한 믿음을 갖고 삶에 견고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올해는 유난히 정처 없는 발걸음을 수없이 찍었다. 탐험하는 한 해를 보내고 싶은 욕심에 다양한 시도를 했다. 목적지향적인 삶이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흘러간 시간이었다. 도전에 대한 뿌듯함은 잠시, ’ 선택과 집중’ 그리고 ‘아웃풋’을 강조하는 시대에 제자리를 맴도는 시간이 한심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한 해가 깊어가는 계절이 돼서야 불안을 감수한 모험의 시간은 자아를 인식하는 중요한 시기였음을 깨닫는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나는 무엇에 의존하고 영향을 받는지, 능력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불안과 불능을 품은 경험을 통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조금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뚜렷한 목표가 없어도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이 없어도 발걸음이 한층 굳건해졌다.


해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자기 숨 길이를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숨 길이는 타고나는 것이므로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망망대해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자기 한계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한계를 깨닫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것과 다르다. 진짜 내가 가진 재능이 찬란하게 꽃 피워서 진정한 아름다움과 행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곧 찬란한 단풍이 떨어지며 가을이 깊어갈 것이다. 조금 더 제자리걸음을 하며 숨을 느껴보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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