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읽고
“평범이란 말보다 큰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평범한 것처럼 나에게 폐가 되지 않고 들썩이지 않고 점잖으며 순하고 착한 무엇도 있을까. 거참, 눈 한번 평범하지 않게 내린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중에서
40번 이상 맞는 정월대보름이다. 처음으로 오곡밥과 나물 그리고 부럼을 준비하고 싶어졌다. 집 근처 어떤 반찬 가게를 가볼까 고민하는데 엄마가 오곡밥을 지었다며 연락이 왔다. 냉큼 친정에 가서 묵직한 가방을 들고 왔다. 밥과 부럼에 묵은 나물 대신 평소 즐겨 먹던 나물 몇 가지를 직접 만들어 구색을 갖췄다. “귀 밝아라. 눈 밝아라.”라며 아이들과 큰소리로 외치면서 귀밝이술이라며 와인도 한 잔 곁들였다.
다음 날 새벽, 어둠 속에서 가족들 아침 식사를 간단히 챙겨두고 가방을 메고 도둑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온몸을 꽁꽁 싸매고 밖에 나왔는데도 거센 바람이 살결을 아린다. 따뜻한 집을 두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굳이 한파 속을 걷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이 마음이 시킨 일이다. 그냥 해보고 싶었다. 텅 빈 카페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어떤 맛인지 궁금했다. 추위에 잔뜩 움츠리고 있었지만, 가슴은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어제 보지 못했던 보름달이 떠올라서 갑자기 방향을 바꿨다. 곧 날이 밝아오면 달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심장이 더욱더 빠르게 뛰었다. 다행히 강 너머 남산 위에 해보다 크고 밝은 달이 나를 기다린 듯 걸려있었다. 거대한 달의 자태에 순간 숨이 턱 멎었다. 대보름에 어울리는 웅장한 달에 매료되어 정처 없이 한참을 걸어갔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장소가 너무 멋져서 일정을 무시하고 빠져들었던 때처럼. 특별한 선물이자 기적 같은 시간이었다.
산 너머로 자취를 감추는 보름달에게 아쉽게 인사하고 카페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넓고 텅 빈 카페를 홀로 누릴 수 있는 오픈 시간을 누리기 위해서. 평소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비던 카페가 적막할 정도로 고요하다. 창가 구석에 자리를 잡고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올려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꽁꽁 언 두 손으로 감싼 커피가 참 따듯했다.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출근 차량으로 붐비는 도로를 바라보며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종이를 꺼내 마음껏 끼적이며 곪아버린 마음을 도려내고 희망과 설렘을 채워보았다. 바쁜 일상에 치여 아직도 가지고 있었던 2021년 달력을 정리하고 새 달력을 채웠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시간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을,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낯선 공간을 마음껏 누렸다. 가족 품의 포근함에 취해 한동안 찾지 못했던 평범한 시간이다. 2시간이 훌쩍 지났고, 고요한 빈자리 자리는 웅성거림이 채워갔다. 자리를 정리하고 가방을 메고 여행을 마무리할 준비를 한다. 미련을 가득 남긴 명당자리는 금방 다른 여행자가 채웠다.
“애들아, 아침 먹었니? 엄마 이제 갈게!”
여행의 끝자락, 남편을 위한 커피와 아이에게 줄 케이크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척 가볍다. 여행이 특별한 이유는 돌아갈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있기 때문이고, 한 번쯤 떠날 수 있는 여행으로 일상은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하루 한 번쯤 물어보고 싶다. 내 삶을 어떻게 채우고 싶은지. 원하는 것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고 두근거리는 시간을 마음껏 허락하며 평범함을 사랑할 수 있길.
거참, 달 한번 예사롭지 않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