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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부신 일상 Mar 06. 2022

단 한 사람

<우리가 녹는 온도>를 읽고

나는 요즘 꽤 자주, 그 사소한, 커피의 온도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마다 혀끝의 온도가 다 다르다는 것에 대해. 한 사람을 순식간에 무장해제시키고 위안을 주는 온도가 제각각이라면,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나 말고 단 한 사람쯤은 나만의 그 온도를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우리가 녹는 온도> p.126


거울을 통해 그녀를 처음 봤다. 통 거울이 둘러싼 넓은 공간에 탱크톱을 입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전문적으로 춤을 배우는 이들 사이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키도 체격도 비슷했고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어설픈 실력도 닮아서 수업 시간에 자주 짝이 되었다. 대체로 경계심 많은 태도로 잘 웃지 않는 나와 달리 그녀는 큰 입을 활짝 벌리고 웃으면서 먼저 다가와 말을 걸곤 했다. 수업 후 그녀는 사는 곳을 물었고 우리는 함께 걸었갔다. 출출하니 뭘 먹자며 내 손을 잡고 카페에 들어가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지곤 했다. 


꽤 오래 재즈댄스를 배웠다. 그사이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었다. 바쁜 일상에도 많이 웃을 수 있고 즐겁게 그곳을 찾았다. 먼저 말을 걸고 손 내미는 그녀 덕분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도 만나서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가 먼저 전화로 일상이나 고민거리를 나누었고 내 안부를 물었다. 퇴근 후 택시를 타고 학원을 찾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실력은 큰 진전이 없었지만 우리 사이는 더 농밀해졌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나누고 공유한 첫 인연이었다. 


재즈댄스 학원은 몇 번 이전하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나는 회사 일이 점점 많아졌고 그녀는 새로운 꿈을 위해 영국으로 갔다. 우리는 자주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영국을 방문해서 첫 휴가를 함께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멀어진 거리만큼 점점 공유하는 삶이 줄어들고 우리를 단단하게 묶었던 끈도 느슨해졌다. 지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란히 서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소를 지나칠 때면 아련한 추억이 불쑥 스쳤다.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지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무심히 흐르는 시간은 우리 사이에 커다란 공백을 만들었다. 그녀는 나보다 결혼이 늦었고 내가 셋째를 출산하기 열흘 전 첫째를 낳았다. 그녀는 내 결혼식 때 영국에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담아 선물과 편지를 보냈다. 첫째를 출산한 날도 조리원에 가장 먼저 찾아왔다. 나는 한국에 있었지만, 그녀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조리원도 가지 못했다. 엄마가 되고 우리 사이에는 다시 얇은 끈이 연결되는 듯했지만 멀어진 거리를 쉽게 좁히지 못한 채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 날, 저녁 준비로 한창 바쁜 시간에 그녀가 전화했다. 쾌활한 목소리 대신 떨면서 울먹이는 소리만 들렸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친구가 있는 병원에 달려갔다. 빈소에서 상복을 입은 그녀를 오랜만에 만났다. 춤을 배울 때처럼 밤늦게까지 빈소에서 그녀와 함께 했다. 발인 때도 화장터까지 함께하며 오열하는 그녀 곁을 지켰다. 항상 받기만 하던 내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그녀가 내 손을 잡은 순간이었다. 


여전히 우리는 큰 공백을 사이에 두고 바쁜 일상을 살고 있다. 각자 앞에 놓인 삶이 녹록지 않아 시시콜콜하게 일상을 나누고 함께 할 수 없다. 요즘 1년이 넘게 연락을 하지 않던 그녀가 자주 떠오른다. 따스한 봄기운 때문일까? 요즘 꽁꽁 얼어붙은 내 마음을 녹여주던 그녀의 따스한 온기가 아련하게 그리워진다. 그녀는 나와 달리 항상 먼저 손 내밀어주었고 마음을 활짝 열고 늘 곁에 있어 주었다. 이제야 그녀가 즐기는 커피 온도가 궁금해진다. 이전과 다른 채도와 농도로 우리 사이 빈 공간을 채우고 싶어 진다. 잘 지내는지 먼저 전화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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