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을 읽고
“촉촉한 모래를 밟으며 나는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내 앞의 바다는 수도 없이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 <긴긴밤> p.124 -
결혼기념일이다. 오전부터 병원에 다녀온 남편이 말없이 식탁에 봉지를 던져둔다. 선물인가? 살며시 봉투를 열어보니 고혈압약이 들어있다. 올 것이 왔구나!
3년 전, 건강검진에서 남편 혈압이 높게 나왔다. 평소 아무 증상이 없었기에 일시적 현상이라 가볍게 여기고 책장에 건강검진 결과지를 던져두고 곧 잊어버렸다. 지난가을 건강검진에서도 여전히 혈압이 정상 이상으로 나왔다. 의사는 약을 권했다. 고혈압약은 평생 먹어야 하므로 바로 약을 먹기 전에 최대한 노력해서 혈압을 정상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소복하게 먼지가 쌓인 혈압계를 꺼내 먼지를 털어내서 남편 책상 위에 올려두고 아침마다 혈압을 측정했다. 체중감량을 위해 식단을 신경 쓰고 혈압 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건강보조식품을 구입하고 개인 PT도 등록했다. 다양한 방법이 효과가 있을지 확신도 없는 상황에서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애가 타고 초조했다. 부산한 나와 달리 남편은 태평했다. 애쓰지 않는 남편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 혈압이 점점 올라갔다.
시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매년 두세 번 응급실에 갔고 끼니마다 많은 약을 먹었다. 결혼 후 약은 늘었고 병원 가는 주기는 더 잦아졌으며 결국 일주일에 세 번 투석하게 되었다. 점점 건강은 나빠지는데도 시아버지가 산책하자고 이끄는 손을 귀찮다고 뿌리치고 저염식은 맛이 없다며 외식을 즐겼다. 빠르게 무너지는 그의 삶은 점점 내 삶을 덮쳐왔다. 가족 중 한 사람의 건강이 악화되면 그 파장이 얼마나 크게 퍼져나가는지 온몸으로 느꼈다. 식탁 위의 약봉지와 소파에 반쯤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남편을 보니 잊고 지낸 아픈 과거가 불쑥 떠올라 무겁게 마음을 짓누른다. 갑자기 시어머니가 원망스러워진다. 만날 수만 있다면 당장 달려가서 무언가 따지고 싶다.
평소 나는 굉장히 건강에 신경을 쓴다. 나보다 더 유난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으니 건강을 챙기는 일에 소홀할 수 없다. 부모님은 건강한 음식을 먹고 매일 운동해야 한다며 지금도 잔소리한다. 물론 그들의 삶은 변함없이 건강한 식단과 즐거운 운동이 함께한다. 노화로 체력은 떨어지고 몸은 예전 같지 않다지만 지병은 없다. 약에 의존하지 않으니 삶에 당당하고 활력이 넘친다. 바쁜 일상에서 꼭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나이 들어가야 할지 부모님을 통해 배우게 된다. 건강에 예민한 나에게 남편은 너무 건강에 무심하게 사는 느낌이다. 결혼 후 다른 생활 습관이 불편하게 다가왔지만, 존중과 배려라는 단어 앞에 적당히 타협하며 지냈다. 이제는 그냥 두고 볼 수 없겠다. 진정한 존중과 배려가 어떤 모습인지 다시 생각한다. 내 안에 꾹꾹 누르고 있던 불편함을 꺼내야 할 시간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당황스러운 선물을 받은 날, 저녁 식사 후 남편은 커피 한 잔을 들고 책상에 앉아서 뉴스를 보면서 게임을 시작한다. 결국 약을 먹게 된 상황에서도 하나도 변한 게 없는 모습에 화가 나서 잔뜩 뿔이 난 얼굴로 남편에게 1시간이라도 걷고 오라며 소리쳤다. 남편은 발을 질질 끌고 나가서 딱 1시간이 되니 돌아왔다. 답답한 속이 조금 나아졌다. 그날 밤, 막내가 칭얼거리며 잠이 깼다. 역시 남편은 침대에 없다. 대체로 남편은 밤에 회의가 많아서 늦게 자는 일이 많지만 회의보다 더 큰 문제는 게임이다. 바로 남편에게 전화를 했고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침대로 왔으나, 핸드폰을 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고 다시 혈압이 오른다.
“핸드폰 끄고 자!”
남편은 조용히 핸드폰을 내려두고 곧 잠이 들었다. 한바탕 큰 소리를 쏟아붓고 나니 심장이 쿵쾅거려서 잠이 오지 않는다. 평소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혼자 조용히 할 일을 할 수 있어서 참 좋은데, 오늘은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생각의 꼬리를 잡으며 긴긴밤을 처연하게 보낼 것 같다. 견디다 보면 곧 해가 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