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rcea Apr 04. 2021

어떤 오후

#1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너무 익숙하고 당연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문득 눈에 띄는 날.

책장에 삐뚤게 꽂힌 책 한 권, 길가 담벼락에 그려진 낙서, 길고양이를 위해 놓인 조그마한 사료와 접시.

분명 평소와 다를 게 하나 없는 하루임에도, 그런 날엔 찬 공기마저 낯설게 느껴진다. 

 

낯선 익숙함을 마주한 순간에는 괜히 눈을 감고 싶다.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손 끝에서 느껴지는 공기의 질감과 두 귀의 가장자리에 맴도는 작은 소음 그리고 새삼 맡아지는 향에 집중하게 된다. 


익숙한 것들이 낯설어지는 순간은 꽤 좋은 느낌이 든다. 죽어있던 것들이 살아있다는 느낌, 아니 죽어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것처럼 보인다. 건조하게 느껴진 흑백사진에 색감이 입혀져 하나 둘 생생하고 촉촉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일상이 말을 건다.

일상의 사소함들이 더 이상 사소하지 않다.


#2

어제는 온종일 비가 내렸다. 

집에만 있기 답답해서 동네를 거닐었다. 


우산을 들고 남은 한 손을 내밀어 빗물을 손바닥에 담아 보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담기지는 않았다. 가끔씩 오가다 보는 작은 동네 카페에 들어가 며칠 전에 구매한 책을 읽었다. 다른 카페에 비해 늦게 열고 일찍 닫는 바람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었는데, 취향에 맞는 올드 팝이 흘러나와 앞으로 자주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길고양이는 금방이라도 도망갈 듯한 자세로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나도 가만히 자리에 서서 고양이와 괜히 눈싸움을 벌였다. 


결과는 참패. 

고양이는 눈싸움 강자였다.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에 눈이 건조해져서 졌다는 구차한 변명은 할 수 없었다. 현관문을 들어서기 전 우산을 털고, 문 앞에 우산을 세워 남은 빗물이 흘러내리도록 하고 집에 들어왔다. 


문득, 어릴 적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고 그의 심정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이 어렴풋이 짐작되기 시작했다. 문학 시간에 배웠던 시대적 배경,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 등과는 별개로, 한 사람으로서 그의 산책이 오늘 나의 산책과 아주 작은 지점에서 어느 정도 맞닿아 있던 것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