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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생 Dec 12. 2022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게 가능하다는 믿음

세상의 판도를 단번에 바꿔버린 코로나를 경험한 세대는 이제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100세 시대에 무려 2년의 시간 동안 전 세계인들의 기억 속에 자리한 팬데믹은 그 영향력이 100년은 더 가리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우리가 계속해서 또 다른 팬데믹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45억 년이 넘는 지구의 역사에서 지구의 온도가 1도 이상 상승한 것이 최근 150년 안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제부터 닥칠 모든 일들이 최초의 일이며, 감히 인간이 대처할 수 없는 수위일 것이라는 것을 당연하게도 예상할 수 있다.


북극곰이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영상도, ‘투발루’라는 섬나라가 소멸위기라는 기사도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재난을 막을 시간을 놓쳐버렸고, 이제는 굳이 먼 곳의 영상이나 기사를 보지 않아도 기후재난을 느낄 수 있다.

전례 없는 폭염에 이어, 잦은 홍수와 산불 그리고 더운 겨울까지.

예년보다 덜 춥다는 뉴스가 도시가스요금을 생각하면 다행스럽다가도,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지를 자각하고 각성한다. 지구의 겨울은 추워야 하니까.


MZ세대가 윤리적 소비에 가장 관심이 많은 세대인 이유는 아마도, 단군 이래 유일하게 환경과 기후로 인한 문제가 본인의 삶에 영향을 미친 세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북극곰을 도와주세요’와 같은 문구를 보고 큰 세대와는 달리, 이건 정말 ‘나’의 문제가 되어버린 세대.
본인들의 소비 행위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 나는 이것이 의식이기보단 본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생존본능에 기인한 어떤 행동이라고.
여하튼 가격과 품질 말고 소비자가 고려하는 다른 어떤 것이 생겼다는 것은 생산자의 행동을 바꾸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유기농과 친환경으로 생산된 재료만을 사용하는 가게가, 저렴하고 양 많은 음식을 제공하는 음식점보다 더 잘 될 가능성이 있어졌다는 것은, 이전의 지구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을 테니.
뿐만 아니라 근로자의 생산환경, 안전, 인권 동물복지 등에도 무관심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생태계가 유지되려면, 모두가 다 같이 최소한의 대접은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 역시 느끼며 컸으니.


지금의 세대가 지구와 환경을 생각하는 소비를 하는 건 이 세대의 도덕적 가치관의 문제가 아닌, 환경의 변화를 몸소 체감하며 자라온 유일한 세대이기 때문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우리도 이 정도인데, 마스크를 끼고 사는 게 당연했던 아이들이 자라면 어떤 사회가 올까.

문득 앞으로의 세대에서는, 그러니까 내가 50대, 60대가 되어 '라떼는~'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시대가 온다면 그때는 세대 갈등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지 싶다.

우리 세대에게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태어나서부터 마스크를 해야 했던 그들에게 우리 같기를, 혹은 우리 세대를 이해해주기를 결코 바라거나 강요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저 부채감을 갖고 그들의 생을 이해해보려는 노력 밖에는 할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백하자면 나는 코로나 이전에는 환경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을 자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심하게 살았고, 종이 빨대를 불편해하던 사람에 불과했다.

여전히 불편함을 감수한 개인의 행동은 미미하다는 자기 합리화 속에서 종종 해야 하는 선택이 아닌 하고 싶은 선택을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자기 합리화 앞에서 무력한 나와 같은 인간들이 지구의 지금을 만든 거구나' 싶어 지면서 관련된 모든 선택권을 시스템이 가져가, 대신해 주기를 바라게 된다.

그 얼마나 수동적인 삶일까 싶지만 능동적으로 좋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것보다, 수동적으로 옳은 선택을 하는 게 지구에겐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의 의지력보다는 상황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이 적어도 지구에게만큼은 더 유의미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기후변화에 따른 비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다.

이를 줄이기 위한 효과적인 행동이 절실하나, 사실 모르겠다. 이제와 인간이 무언가를 한다고 돌이킬 수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

제목은 '기후환경에 대처하는 게 가능하다는 믿음'이라고 정했지만, 쓰다 보니 그 믿음이 없다는 이야기만을 하는 중이다.

진짜 태양폭발 등의 외부적인 요인으로 지구의 모든 전기가 작동되지 않는 상황 정도는 와야 지구가 살지 싶은데, 그럼 슬프게도 인류는 살아있기 힘들 테니 무엇을 응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Our fate is in our hands.
The world is counting on all of us to rise to the challenge before it’s too late.

기후변화 대응에 강한 결정과 빠른 행동이 필요하다는 유엔 사무총장의 말처럼, 이제는 정말 뭐라도 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전쟁과 정쟁 등.

도대체가 이 세상은 계속해서 무의미한 것들에만 힘을 쏟고 있는 듯하다.

영화 [돈룩업]은 현실 그 자체였음을 다시금 실감하며,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도 이렇게 염세주의자 같은 발언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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