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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생 Oct 27. 2022

이제 불매운동 끝났나요?

독립서점에 방문했을 때 읽었던 책의 구절이다.

평소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디자인의 책을, 제목 때문에 집어 들었다.

전부 읽고 나오지는 못했지만, 공감하는 구절이 있기에 적어왔다.


멋지게 살 도리가 없는 세상에서
멋지게 살자고 말하는 건 얼마나 멋진가.
그 무모함은.

나는 그런 사람이 좋다. 오만할 법한 위치인데 겸손과 성찰을 잃지 않는 사람, 누가 봐도 초라한 처지인데 아랑곳없이 기개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정직한 사람들이다.

사적 관계에 반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하는 것, 손해나 고통을 무릅쓰고라도 원칙과 신념을 지키는 것이 의리다.
알고 보면 의리라는 말처럼 귀한 말도 없다.
그리고 이제 '의리 있는 사람 은 온 나라를 뒤져도 찾기 어렵다.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중


사적관계에 반하더라도 마땅히 할 도리를 하는 것은 해가 갈수록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이해관계가 더 넓어지며, 결정에 앞서 고려해야 할 상황과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더더욱 쉽지 않다.

손해와 고통을 무릅쓰는 사람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에도 공감했다.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선택을, 양심을 기준으로 하는 사람은 저 문장처럼 정말 귀해진 게 맞다.


끓었다 식어버렸던 불매운동들이,

코로나 이후 여행이 풀리자 예매율 1120%가 늘어났다는 일본 여행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선택의 기준에 양심은 없이, 그냥 산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위에 불매운동은 선택이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며 같은 것을 보고 듣는데 왜 누군가는 그에 반하는 선택을 하는 것일까.


사람을 좋아하는 나는, 그들이 자신의 선택이 곧 투표임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버리고 싶다.

불매운동에 반하는 구매행위는 해당 기업의 도덕적 책임 없는 경영을 지지하는 것이며,

지금 일본에 가는 것은 국가로서의 일본이 대한민국에 행하는 무례함을 용인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일본 여행을 이 시국에 가는 것에 대한 찬반 의견이 많아 보인다.

누군가는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며 엔화가 약세를 보이고 있는 지금, 왜 아직도 가면 안 되는 것인지를 묻는다.

나는 되묻고 싶다. 도대체 뭐가 달라졌기에 이제는 가도 되는 거냐고.


일본제철에서 강제징용을 하게 된 할아버지 두 분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1965년 청구권 협정을 거론하며 무려 13년 8개월간 법정 싸움을 지속했다.

승소 판정이 나자, 대법원의 판결에 반발하며 중재위원회를 열자더니 갑자기 수출 규제를 시작해버렸다.

현재까지 살아계신 이춘식 할아버지는 "나 때문에 큰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 부담이 된다"며 미안해하셨다.

정작 사과해야 할 그들이 아닌 피해자 할아버지가, 억울함을 당한 주체이신 분이 사과를 하신 것이다.

경제보복이라고 이름할 수도 없다. 보복은 보통 피해자들이 하는 것이니까.

이건 사실상 시비였고, 한 국가가 그것도 전범국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내가 불매운동을 지속하는 이유는 하나.

진짜 피해자들의 편에 서기 위해서다.

지금의 시대는 나에게 독립운동도, 강제징용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불매라는 아주 작은 행동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모두 저분들 덕분이다. 우리 선조들이 피 흘리며 지켜낸 덕분에 나는 안락하고 편안하게 일상을 전부 지켜내면서 그저 소비하지 않는 행동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엄청 떳떳한 애국 소비자는 아님을 고백한다.

여전히 세일 문자에 롯데마트를 방문하고, 다이소를 때때로 이용한다.

생각이 있다가도 너무 덥거나 추운 날 이내 몸이 편한 선택을 하게 된다.

핑계다. 이 글을 적으면서 한번 더 반성한다.

이걸 왜 시작했는지 잊지 말아야지, 계속해서 때때로 되뇌어야지 다시금 다짐해본다.

평생 하자는 게 아니라 저들이 우리의 불매운동을 비웃고, 침략국임에도 서점에 한혐코너를 마련해두고, 도쿄 한복판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모독 행위를 하는 등의 저급하고 근본 없는 행동을 그만두고 진심으로 진심 어린 사과를 할 때까지만이라도 계속하자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는 말이다.


우리의 미래는'평범한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아지는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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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편에 선다는 것이 유별나고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단지 당연한 공평함을 회복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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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지난 올바름은 알아보지만 지금 올바른 건 잘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가장 올바른 삶은 언제나 가장 외롭다.
그 외로움만이 세상을 조금씩 낫게 만든다.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늘 그렇다.

같은 책에 나온 구절이다.

지난 올바름을 알아보듯, 지금 나의 행동이 후대에 어떻게 비추어질지 모두가 한 번씩만 더 생각하고 행동하길 바란다.

생각보다 우리는 많은 선택지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 모두의 행동은 더 큰 힘이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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