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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생 Jun 02. 2023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오늘의 책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사실 초반 한 챕터를 읽고 덮어두었던 책이다.

'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자 간병과 돌봄의 무게를 홀로 감당하는 사람들의 벼랑 끝 선택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된 이 책은 설정도 슬픈데 묘사마저 생생해서, 고작 그만큼을 읽고도 마음 한편이 시큰거렸기 때문이었다.

이유 없이 기분이 맑은 금요일이니, 다시 이 책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노인은 정말 엄마가 걱정되어 한달음에 달려온 사람처럼 보였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하얀 피부가 창백해 보이긴 했지만 두툼한 오리털 점퍼에 잘 다려진 모직 바지, 머리에 쓴 밤색 중절모는 그가 가족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짐작게 했다.

노모를 홀로 간병 중인 명주의 문장이다.

외관만을 보고도 보살핌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했다는 표현을 이해했다.

사람이 아니라 하물며 키우는 반려동물조차도 사랑받는 정도가 태로 나타나는 세상이니.

티가 나기 때문에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욱 외로워지는 게 아닐까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처음엔 명주도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엄마를 돌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밖에서 겪는 모멸감에 비하면 내 엄마를 간병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란 걸 알게 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 안에 있는 자비심이란 얼마나 알량하고 얄팍했던지. 명주는 엄마를 돌보기 시작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사람 안의 자비심이란 얼마나 알량하고 얄팍한지. 하는 문장이 이해 갔다.

간병은 고령화 사회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문제가 된다.

저마다의 사정에 정답이 존재할 수도 없는 문제이기에 더 어렵다.

돌봄이 부디 사회의 몫이 되길 바라다가도, 출산율이 이토록 낮은 지금의 시대에 아이를 갖지 않으면서 그런 세상을 바라는 게 마치 남의 자식 노동력에 기대 살고 싶다는 염치없는 바람같이 느껴져 이내 생각을 바꾼다.

내 안에서도 정답을 내리지 못하는 문제에 사회적 합의가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AI가 해결책이 되어주기를, 그런 미래가 오기를 바라는 비겁한 희망만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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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을 받기 위해 간병하던 어머니의 죽음을 국가에 알리지 않은 주인공 명주를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간병이라는 건 정말 해본 사람만이 안다.

나 역시 당사자가 아닌 옆에서 지켜본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육아와 간병은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느껴왔다.

둘 다 한 인간을 온통 희생해 다른 인간을 살게 만드는 행위이니 말이다.

꼭 가족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든, 한 인간의 온전한 노동만이 간병과 육아로 치환될 수 있는 듯하다는 점이 그렇다. 

때문에 가끔 뉴스에서 접하는 간병인들의 극단적인 선택에 어떤 말을 보탤 수가 없다.

간병하는 모든 사람들의 결정에 돌을 던질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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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내기 힘든 소설이었다.

그렇기에 추천하기 어렵다.

세상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힘들기에 책이나 드라마 등의 픽션에서 만큼은 현실과는 먼 이야기를 보고 싶은 건 나뿐만은 아니리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한 번쯤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분명히 벌어지고 있을 일들을 마주할 여유가 생긴다면 추천한다.

이 소설은 픽션이지만, 어디선가 이 이야기는 논픽션이기도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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