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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경은 Sep 13. 2024

5만원권

종종 울타리가 있는 삶을 상상한다. 부러운 마음 약간, 치기어린 시기심, 체념에 가까운 납득을 동반한 상상이다. 어려서는 부모가 울타리일테다. 조금 더 성장해서는 오로지 내가 스스로의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예상보다 그 시기는 빨리 온다. 선선함을 잊은 9월처럼 가슴이 답답해질 때마다 울타리가 되어준 기억들을 더듬어본다. 


  대학교 4학년. 나는 평행봉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청춘이었다. 4년제 사립대학의 등록금을 마련해주었다는 아버지의 자부심은 확고했다. 더이상 금전적인 지원은 없다는 뜻으로 전해지곤 했다. 그럼에도,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품어와서 언제 부화해도 상관없을 꿈이. 목표는 확고했지만 실현할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 꿈의 여정은 시작도, 끝도 모호했다. 


  정보를 그러모아 기준에 맞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한껏 욕심을 내 복수전공에 연계전공까지 이수하고, 대외활동에 힘쓰느라 정신없는 대학생활을 했다. 나에게 입증하고 싶어 끊임없이 무언가를 했다. 누군가는 강박, 집착이라고 평가했다. 달리고 또 달리다 문득 앞을 보니 '졸업'이 성큼 다가와 있었고 나는 가능성이라는 애매한 이름표를 단 무직자 신분을 앞두고 있었다. 매일 입 안이 쓴 시절이었다. 툭하면 눈물이 났다. 


  외로움과 불안함, 막막함을 나눌 존재도 마땅치 않았다. 가족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분주했다. 교우들은 대부분 1년 이상 휴학을 해 만나기도 어려웠다. 절친한 친구는 교환학생으로 독일에서 1년간 체류하고 있었다. 스카이프로 띄엄띄엄 만나는 사이에도 나의 불안과 우울은 저 멀리 독일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담담한 척 했지만 내심 걱정했던 모양이다. 때로는 나도, 이 휘청거림을 감추지 못하거나 감추기 싫은 마음도 들었다. 


  1년은 겨우 지나갔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 그녀는 짧은 일본 여행을 제안했다. 여유를 쥐어짜 일본으로 향했다. 서로의 수고로움 덕분에 2박3일간 추억을 쌓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날, 나는 그녀의 부모님을 만났다. 어머님이 나에게 5만원권을 쥐어줬다. 이번에 새로 나온 지폐래. 신기해서 아줌마가 기념으로 주는거야. 라는 말씀을 덧붙였다. 친척이 아닌 어른에게 돈을 받는 일과 5만원권의 생경함과 말로 담을 수 없는 신선한 충격이 몰려왔다. 생각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눈물이 줄줄 흘렀다. 살아오면서 타인에게 느낀 맹렬한 감동이었다.


  5만원권 지폐의 얼굴을 하고 나에게 닿은 응원은 여운이 오래갔다. 그날의 다정이 나를 살렸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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