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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Jul 18. 2023

내셔널리즘은 죽지 않습니다

누구도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원리 자체에 차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편애 감정이 '내셔널리즘'을 키웁니다. 내셔널리즘은 다양한 의미로 통하지만, 그 기본은 내가 속한 '네이션(국민 집단)'에 애착과 소속감을 느끼고, 네이션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기조입니다. 이런 기조는 정치 밖에서도 흔히 관찰됩니다. 스포츠 경기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이 만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순식간에 내셔널리스트 전사가 됩니다. 이런 감정은 매우 강력해서, 근대 이전부터 현대까지 인류를 여러 사회로 나눠 왔습니다. 지금도 세계지도는 네이션들로 가득합니다.

최근 내셔널리즘은 이상주의자들에게 부당하게 기소당했습니다. 기소장에 따르면, 네이션을 향한 애착은 인종 학살과 침략 전쟁의 원인입니다. 안티 내셔널리스트는 악을 뿌리 뽑기 위해 내셔널리즘을 극복하고 다문화, 다인종 사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 탓에, 세계 곳곳에서 좌우 대립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내셔널리스트와 안티 내셔널리스트 사이에서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안티 내셔널리스트는 내셔널리즘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셔널리즘은 근대에 갑자기 나타난 발상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사람을 하나의 큰 집단에 속하게 만든 원동력에, 내셔널리즘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을 뿐입니다. 사람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내가 속한 집단의 특성을 파악하고, 같은 특성을 공유하는 사람을 더 신뢰합니다. 이런 내집단 편향은 성장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네이션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도 마음 속에서는 또 다른 대체 네이션을 사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내셔널리즘이 반드시 인종주의를 유발하지는 않습니다. 흔히 내셔널리즘을 피부색이나 역사 속 조상 같은 '혈통'과 연관짓지만, 혈통은 단일하고 영원불변하지 않습니다. 혈통은 결혼처럼 여러 경로를 통해 결합됩니다. 만약 한국인과 일본인이 결혼해서 한국에서 산다면, 두 사람은 한국이라는 네이션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무 관계도 없던 사람의 가족이라도, 결혼하고 난 후부터는 애착의 대상이 됩니다. 네이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순혈은 공상에 가깝고, 내셔널리스트도 이 사실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셔널리즘은 사회 구성원끼리 설명하지 않아도 파악할 수 있는 공통점에 기반합니다. 사람은 그런 공통점을 공유하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낍니다. 누구나 공통점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공통점 덕분에 상대방의 반응과 행동을 비교적 쉽게 예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사람을 만나면, 누구나 불안감을 느끼고 불편해지기 마련입니다. 예측하기 힘들어서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런 보편적인 심리 탓에, 세상은 내셔널리즘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심리를 무시하고 다문화 다인종 정책을 밀어붙인 나라는 대체로 재앙을 겪었습니다. 가장 관대하다는 유럽이 다시 국경을 닫으려 하는 것도 예측 불가능한 새 이웃을 불편하게 여기는 마음을 이해하지 않는 안티 내셔널리스트가 무모한 정책을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여러 인종이 공존해 온 미국에서도 인종 갈등은 더 격해지고 있습니다. 한 집단 안에 여러 피부색이 공존하는 일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언어와 문화가 공존하는 일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여러 사람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서로 공통점이 충분해야 하고, 그 공통점은 애착을 낳습니다. 이런 감정을 무시한 대가는 대혼돈 뿐입니다.

내셔널리스트와 안티 내셔널리스트가 벌이는 새로운 갈등에서 승리하는 쪽은 내셔널리스트일 것입니다. 내셔널리스트는 사랑하는 집단을 바꿀 수는 있어도,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사랑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내셔널리스트라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셔널리스트가 됩니다. 가족 사랑이 반드시 이웃 혐오로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내가 속한 국민 집단에 대한 사랑이 반드시 다른 국민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내셔널리즘 자체를 적으로 몰아가는 사람은 도로명을 잘못 검색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궁극적으로 볼 때 민족주의는 마음의 상태다. 즉 공동체적·정치적 정체성과 친밀감과 운명을 공유한다는 의식, 에르네스트 르낭의 말을 빌리면 “매일매일의 국민투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마음 상태는 다른 공유된 마음의 내용물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그 내용물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공통된 문화와 친족 감정이다."
- 아자 가트, 민족

"시민적 국가들이 순전히 시민성과 정치 제도의 공유에 기반한다는 순진한 이데올로기적 허구는, 좋게 말하면 관용에 대한 열망과 편견에 대한 거부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고 나쁘게 말하면 ‘허위의식’에 깊이 물든 상태다. 물론 모든 민족에는 강한 시민적 요소가 있으며 거기에는 다양한 혼합과 균형이 존재하지만, 시민적 협력의 토대로서 친족-문화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의식에 의존하지 않는 민족은 드물다."
- 아자 가트, 민족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든 외계인 방어를 위해서든 인간 사회들이 서로 의지할 때라 해도, 차이점의 무게감이 감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전 세계 사람들이 인류 전체와 하나로 연결된 느낌을 가질 것이라는 범세계주의 관념은 하나의 몽상에 불과하다."
- 마크 모펫, 인간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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