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가 또 저질렀다. 21년 여름에는 직원이 광명시흥지구 3기 신도시 계획을 이용해서 투기를 벌이도록 하더니, 올해 여름에는 기어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아파트 부실 공사도 관리하지 못했다. LH는 100조 원 어치가 넘는 부동산을 소유하는 공기업이다. 값싼 공공주택을 공급해서 가계부채가 폭증하지 않게 발목 잡는 역할도 맡는다. 그런 중요한 공기업이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해체할 수도 없고 방치할 수도 없다. 대체 이 금쪽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와중에 LH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는 아직 주목받지 않고 있다. LH는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린 것보다 더 큰 잘못을 범했다. 공공정신을 잃은 LH 때문에, 우리나라는 보다 공정한 사회로 나아갈 경로 하나를 잃어버렸다. LH는 더 공정한 사회를 위한 청사진을 찢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공정한 사회'란 모두가 충분한 기회를 보장받고 기여한 만큼 보상받는 곳이다. 흔히 공정함은 시험 성적에 따라서 줄을 세우는 것을 가리키지만, 그런 공정함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공정한 시험 문제를 개발해도, 사람마다 지출할 수 있는 교육비와 병원비가 크게 다르다면 결과는 어느정도 예측된다. 공정한 절차가 세습 도구로 사용되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보다 적극적인 공정함이 필요하다. 정서건강과 인지 능력이 자리잡는 어린 시절을 보호하고, 불로소득을 흡수해야 한다. 그래야 보다 공정하다.
우리나라는 토지와 주택 등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소득에 굉장히 관대하다. 부동산 소득은 상당부분 불로소득이다. 소유주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정부가 개발 계획을 세우거나 여러 기업이 주변에 투자하기 시작하면, 부동산 가치는 알아서 불어난다. 부동산 소유주는 위험를 감내하거나 관리자로서 일하지 않아도 큰 돈을 벌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정확히 어느정도까지 불로소득인지는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한 영역이다. 실제로 부동산 소유자가 위험을 감내하며 투자해서 개발을 주도하는 경우도 있고, 법에 따라서 건물을 관리하며 일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근로소득과 다르게 부동산 소득에 개인의 노력보다 사회적 발전의 지분이 많다는 점은 분명하다. 실제로 19세기 존 스튜어트 밀부터 21세기 조지프 스티글리츠까지, 이름 있는 경제학자들은 일관되게 부동산 소득의 불공정함을 지적해 왔다. 본의 아니게 경제학의 아버지가 된 애덤 스미스도 지주들을 매우 혐오한 걸로 유명하다.
만약 사회가 불로소득을 흡수하고 전국민의 어린시절을 보호하는 데에 그 돈을 사용한다면, 우리나라는 보다 공정하게 경쟁하는 사회, 능력에 따라 일하고 기여한 만큼 보상받는 사회에 더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흔히 불로소득을 흡수할 때 활용하는 방법은 세금이다. 적절한 세금은 재산권을 근본적으로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불로소득을 흡수할 수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토지공개념의 대명사로 통하는 헨리 조지도 적극 권장한 방법이다. 1900년대 초 영국에서는 자유당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윈스턴 처칠이 토지에서 발생하는 양도소득에 높은 소득세를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우리나라는 노무현 정부 때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했다.
그런데 세금은 우리나라에서 그닥 편리한 방법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조세 저항이 심각한 곳이다. 정부가 부패하고 무능한 탓도 있지만, 애초에 그런 문화가 없는 곳인 탓이 크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끼리 한 곳에 소득을 모아놓고 공동으로 지출하는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봐야 같은 동네 사람끼리 계 모임을 갖는 게 전부다. 우리나라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세금을 감당하는 덴마크 사람들은 수백년 전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 지출을 연습해 왔다. 덴마크 사람은 소득을 함께 쓰는 일에 익숙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이런 문화 차이가 조세 저항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세금보다 적극적인 방법은 유능한 공기업이 전국의 부동산 일부를 소유하고 경영하는 것이다. 일명 '토지공공임대제'다. 세세한 방법은 설계하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기본 골자는 이렇다. 시장경제에서 부동산 불로소득이 자연히 발생할 수 밖에 없다면, 차라리 사회가 그 불로소득을 창출하고 사회적으로 활용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연금처럼 자율성과 전문성을 가진 공기업이 시장에서 제일 큰 부동산 투자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 세금을 적극 활용하기 어렵다면, 이런 식으로 공적인 투자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공적 투자를 시도하기도 전에 불신하게 되었다. 가뜩이나 큰 정부 자체에 대한 불신도 심한데, LH가 분탕질을 한 탓에 정부가 부동산 시장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어려워졌다. 앞으로 인구가 줄고 지방이 소멸하면, 부동산이 큰 지분을 차지하는 금융시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정부가 부동산을 수용해야 하는데, LH 탓에 공적인 영역이 신뢰를 잃었다. LH 사태는 단순한 개개인의 부패 사건이 아니다. '공공'이 힘을 잃은 대사건이다. 이를 회복하려면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공정에 희생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