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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Nov 13. 2024

[진단명, 절망] - 들어가는 말

청년의 절망은 사회의 염증이다

마음의 평화라는 난제


 서른이 되었지만 어른이 되지는 못했다. 여전히 번듯한 직업이나 경력도 없이 집안일을 도우며 글을 쓰고 있다. 마음이 주변 상황에 따라 흔들려도 차분하게 다잡을 줄 모른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불안정한 나는 '어른'이라는 무게감 있는 자격증을 받을 수 없다.


 다만, 누군가의 절망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확실히 배우고 서른이 되었다.

 최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 순탄하지 않은 20대를 보냈다.


 열일곱에 유일한 소득원이던 아빠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경력이 단절된 가정주부였던 엄마는 부족한 소득을 신용카드와 대출로 벌충했다. 그 이자가 감당할 수 없이 불어나자 개인회생을 신청했지만, 엄마 혼자서 개인회생 변제금과 생활비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5년 동안 개인회생 변제금을 같이 부담해야 했다.


 동생은 이제 중학생이었으니, 장남이자 곧 성인인 내가 나서야 했다. 그렇게 나는 열아홉부터 아르바이트로 일했다.


 처음 1년 반 동안, 80만 원을 받으면 5, 60만 원을 엄마 계좌에 넣었다. 출퇴근 비용까지 빼면 내 통장에 10만 원 정도가 남았다.


 나는 그 돈으로 책을 샀다. 독서가 유일한 취미였고, 전보다 더 심해진 불안감을 이해하고 진정시키려면 책이 필요했다.


 어릴 때부터 명치가 아플 정도로 큰 불안을 자주 느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증상을 잘 설명할 방법을 몰랐고,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면 훌륭한 사람이 쓴 책부터 찾는 버릇이 생겼다. 아르바이트로 일하며 마음이 더 무너지려 할 때도 나는 버릇대로 행동했다.


 물론 어떤 책이 좋은지 비전문가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실험했다. 우선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베스트셀러를 골랐다. 그 책의 조언을 따라 보고, 결과가 나쁘면 다른 내용을 다루는 책을 찾았다. 그런 식으로 유용한 조언을 찾아나섰다.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또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주변에 조언자가 없는 사람은 몸으로 부딪히는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남은 돈으로 심리상담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멀리 돌아가지 않고 명치가 아플 정도로 불안한 이유와 해법을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집에 보내고 남은 돈을 병원비로 쓰고 싶지 않았다. 단 10만 원 정도는 내 마음대로 쓰고 싶었다.


 애초에 10만 원으로는 심리상담을 꾸준히 받을 수 없었다. 상담이란 꽤 사치스러운 치료였다. 좋은 상담사를 찾을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고, 어차피 남에게 의지해 본 적 없으니, 내 문제는 내가 분석하고 해결해야 했다.


 나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1년 반 동안 강박처럼 책을 사며 비과힉적인 실험을 반복했다. 내면의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거나, 하루종일 만트라를 외웠다. 달을 응시하며 그 에너지를 받는 법도 연습했다.


 그렇게 숟한 실패를 반복한 결과, 나는 스물하나에 화장실에서 자살을 시도했다.


한눈에 들어온 그림


 바보 같이 자살에 실패한 뒤로 더 무기력해졌다. '죽어야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죽는 데 또 실패하면 어쩌지. 애초에 죽는다고 정말 다 끝일까.' 생각과 생각이 장기전을 벌이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극적인 영상을 보거나 낮잠을 자면서 주의를 돌리는 것 뿐이었다.


 무력감이 꺼질 줄 모르는 자살 생각에 장작을 던졌고, 마음 속 화재를 전혀 제압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나는 다시 무기력해졌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시도할 의욕도 없었다. 나는 그저 죽지 못해 살고 있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로 군에 입대했다. 나는 계속 일해야 했지만, 조국은 개인 사정을 들어주지 않았다. 당연히 군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에 내 체력으로 감당하기 힘든 훈련까지 겹치자, 마음은 확실하게 무너졌다. 부대에서는 소위 말하는 폐급으로 통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에게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만 문제였다.


 어느날 산을 오르는 행군 중에 쓰러졌다. 손발이 굳을 정도로 호흡이 거칠어진 탓이었다. 불침번을 서는 중에도 쓰러지고, 아침에 집합하기 전에도 쓰러졌다. 처음에는 천식인 줄 알았다. 어릴 때 호흡기가 안 좋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내과에서 검사받으면 나오는 것이 없었다.


 마지막에는 중대장님의 배려 덕에 정신과 군의관을 만났고, 지금까지 겪은 증상들이 모두 설명되는 진단명을 받았다. 나는 공황장애였다.


 진단을 받고 나니, 그제서야 지금까지 겪은 일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통합되는 듯했다. 나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문제에 혼자 맞서겠다며 고집을 부렸고, 숱한 실패를 겪으며 절망을 자초하고 있었다. 허탈함에 깊은 한숨이 나왔다.


강박의 순기능


 군병원에 몇 개월 동안 입원한 후, 나는 현역부적합심사를 거쳐서 전역했다. 그 동안 항불안제를 계속 먹은 덕인지, 쓰러질 정도로 거칠게 호흡하지는 않게 되었다. 호흡이 거칠어지더라도 조용히 앉아서 쉴 곳이 있다면 일상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오자 마자, 나는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했다. 이제는 개인회생 뿐만 아니라 내 병원비까지 챙겨야 했다. 신경정신과에서 약만 받아오는 데는 한 달에 2만 원 정도면 충분했다.


 남은 돈으로는 버릇대로 책을 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책이나 읽지 않았다. 항불안제의 효과를 체감한 뒤로, 내 안에는 심리학에 대한 신뢰가 자리잡았다. 나는 인지행동치료 같은 여러 심리학 이론에 대해 공부했다. 자살에 대한 연구도 접했다. 자살은 절망의 증상이었고, 나는 청년기에 자살을 시도한 수 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는 혼자 불안과 자살 생각에 맞서야 한다는 고집을 서서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혼자 힘으로 다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나에게는 효과 있는 약이 필요했고, 서로 지지해 주는 관계가 필요했고, 희망을 주는 사회가 필요했다. 여기서 어느 것도 혼자 만들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삶의 의욕이 샘솟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원인과 해법을 전혀 모르고 헤매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최소한 나침반이라도 있으니까.


 나는 매일 약을 먹고, 책을 읽고, 왜곡된 사고방식에 맞섰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개인회생이 끝나고, 엄마 호봉이 끝까지 오르고, 동생이 안정적인 곳에 취업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나 하나 쯤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되는 상황이 갖춰 졌다.


 상황이 조금 여유로워지자. 나는 짧고 불안정하더라도 마음 속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확실히 줄었다. 그 동안 대학교도 안 다니고 아르바이트만 했지만, 그래도 불안과 절망, 자살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다소 엄하게 배우고 서른이 되었다.


새로운 목표


 운 좋게 늪에서 먼저 빠져나온 사람이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아직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손을 뻗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겪은 것과 공부한 것을 공유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음 속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절망한 청년이 나처럼 엉뚱한 길로 새지 않도록, 적어도 자신이 처한 문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파악할 단서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내가 20대에 겪은 일을 보다 자세하게 공유한다. 잘못된 방법으로 마음 속 고통과 싸우다가 자살을 시도하고, 자살 생각과 싸우다가 서른이 다 되어서야 짧지만 소중한 평안을 얻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흔히 다른 사람의 자살 이야기가 자살을 확산시킨다고 이야기하지만, 국제보건기구는 오히려 자살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자살 연구가들도 혼자 문제에 갇혔다는 생각이 더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걱정 없이 실제 자살시도 경험을 그대로 풀었다.


"자살에 대해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자살행위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살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더 나은 선택의 길을 열어주거나 자살을 하고자 하는 결정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 국제보건기구1)


 2부에서는 내가 공부한 것을 공유한다. 중점은 청년 자살과 그 원인이다.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청년이 죽는지부터 시작해서, 그 심리적, 사회적 원인까지 다룬다.


 절망은 우울감 같은 여러 증상을 초래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자살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자살 문제에 중점을 뒀다.


 또한 절망은 고질병이라, 되도록 빠른 시기에 개입해야 한다. 이 때 아동, 청소년은 보호자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으니. 여기서는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있고, 또 누군가의 부모일 수도 있는 청년의 절망과 자살을 다뤘다. 비록 비전문가지만,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모아서 근거로 삼았다.


 마지막까지 환자를 돌보다가 피습당한 정신과 의사, 고 임세원 교수는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다.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이 죽었다면 무언가 다른 원인을 의심해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자살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디, 이 책이 마음 속 문제를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감, 한 발 더 나아가서 다 괜찮은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절망감과 맞서는 데에 도움되기를 바란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원하는 것일까? 그들은 정말 죽고 싶어 하는 것일까? 대답은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 고 임세원 교수2)


주석.

1. 2019 WHO 자살예방 문헌집, 중앙심리부검센터 옮김, 77p.

2. 임세원,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전자도서], 알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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