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사회조사 결과
올해 2월, 보건당국이 살짝 긴장했을 것이다. 외래환자 천 명 중에서 30.4명, 즉 3%정도가 독감 의심환자였다. 어떤 전염병 의심환자 수가 외래환자 천 명 중 8.6명을 넘으면, 보건당국은 그 병이 유행한다고 여기고 대응을 시작한다. 올해 초 독감 환자 수는 유행 기준의 3배였다. 작년보다 독했다.
올해 11월, 국가데이터처는 '2025년 사회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국가데이터처는 어려울 때 도움받을 사람이나 평소 자주 어울리는 사람, 즉 교류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사회적 연결망이 얼마나 튼튼한지 측정하기 위해서다. 통계표 76페이지에 연령, 성, 소득수준별로 응답 현황이 나온다.
통계에 따르면,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사회적 연결망이 약하다. 빈곤하고 고독한 노인이 많아서 그런 듯하다. 물론 젊은 사람도 돈이 없으면 사회생활에 참여하기 어렵다. 애인도, 친구도 만들지 않고 방에 틀어박힌 청년은 꾸준히 관찰되고 있다. 청년 고독사도 새삼스럽지 않다.
눈에 띄는 것은 10대 청소년의 사회적 연결망이다. 청소년 10명 중 3명이 가족과 친척 중에서도 교류하는 사람이 없다고 답했다. 다른 통계에서도 적지 않은 청소년이 혼자 저녁을 먹거나 가족과 대화하지 않는다고 답했으니, 부풀려진 수치는 아닌 듯하다. 20대 역시 가족과의 교류가 부족해 보인다.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가족 외에 교류하는 사람이 줄어든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새 가족이 생기는 것도 아니라서, 가족 중에서 교류하는 사람이 크게 늘지도 않는다. 그 탓인지, 연령대와 상관 없이 성인 5분의 1이 사회적 연결망 밖에서 산다. 이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립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단서다.
의지력 연구로 잘 알여진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소속감 욕구(need to belong)가 인간의 근본 욕구라는 점을 강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소속감은 큰 집단에 소속되어 함께 활동할 때 느끼는, 그런 감정이 아니다. 퇴근하면 엄마, 아빠를 부르면서 달려오는 자녀가 있을 때 느끼는 감정, 힘들 때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한숨을 쉴 수 있는 상대가 있을 때 느끼는 감정, 상대가 내 삶의 일부인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길 때 느끼는 감정, 상대와의 관계에 깊이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 즉 '애착감'을 가리킨다.
바우마이스터는 소수 친밀한 사람과의 깊은 교류를 반복하며 애착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를 need to belong이라고 불렀고, 이 소속감 욕구가 다른 여러 동기나 정신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여러 번 관찰했다. 그래서 소속감 욕구를 여러 욕구들 중에서도 보편적으로 중요한 근본 욕구라고 결론내렸다.
이 근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게 되면, 사람은 가볍게는 의욕을 잃고 무겁게는 자살 생각에 시달린다. 자살 연구가들도 소속감이나 유대감 등 좋은 관계에 속할 때 느끼는 감정이 자살을 막는 주요 요인이라고 여긴다. 하버드 발달연구도 수십 년에 거친 관찰 연구 끝에 '관계'가 행복을 예측하는 핵심 요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10대 청소년 3분의 1이 가족과 친척 중에 교류가 없다고 답했다. 가족 외 사람 중에 교류 관계가 없다고 답한 청소년도 14%나 된다. 성인 5분의 1은 가족이든 친구든 남들과 교류하지 않는다. 외래환자 중에서 이 정도 비율이 독감이나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렸다면, 보건당국은 연차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흔히 고독을 어른의 증표, 성숙함의 상징처럼 이야기하지만, 잠시 쉬기 위해 혼자가 되기를 선택했지만 언제든 관계망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태와 소속될 관계망 자체가 없어서 고립된 상태는 엄연히 다르다. 기질적으로 외로움을 덜 느끼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고립감은 절망의 뿌리, 절망의 비료다.
절망한 사람은 다소 극단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희망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당장 괴로운 상태에서 벗어나는 데 급급해지기 때문이다. 절망이 확산하면, 누군가는 자살을 시도할 수 있고, 술과 마약에 빠질 수 있고, 사이비 종교나 극단주의 이념에 혹할 수 있다. 지나가던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공격할 수도 있다. 절망은 코로나 19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사회 전체에 치명적이다.
위기 신호는 귀가 아플 정도로 울리고 있고, 위기가 남긴 상처는 충분히 덧나고 있다. 남은 것은 이대로 각자도생하며 공멸할지, 아니면 상호의존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집단적인 대응에 나설지 고르는 일이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
-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6장 2절 (가톨릭 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