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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Feb 25. 2023

아마추어 의심쟁이가 사는 법.

아무거나 다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제 지식은 얇습니다. 저는 우리말로 쓰인 책, 그 중에서 온라인 서점에서 구할 수 있고 수학과 논리 기호를 몰라도 읽을 수 있는 책을 주로 읽습니다. 정부기관이 발행하는 연구보고서나 논문을 종종 찾아서 읽기는 하지만,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거나 갖고 있는 책에서 얻은 기초 지식으로 읽기 어려운 글은 고르지 않습니다. 그런 글을 열어 보면, 대포 없이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공략해야 하는 입장을 간접 체험합니다. 외국어와 함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제가 모르는 전문용어가 가득한 글에는 접근하지 못하는 만큼, 제가 파고들 수 있는 깊이는 한계가 명확한 셈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잘 모르는 영역에서는 권위 있는 사람이 내세운 주장을 잠정 결론으로 받아들입니다. 의심 많은 회의주의자라면서 무슨 소리인가 싶으시겠지만, 오히려 건전한 회의주의자라서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불안장애 약을 처방받았습니다. 처방받은 약이 어떤 실험을 통과했는지, 정신장애가 심해지지 않도록 약으로 억제한다는 발상이 얼마나 근거 있는지에 대해서 직접 공부한 적은 없습니다. 권위 있는 전문의가 주는 약이니까 받아들일 뿐입니다. 의심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의심할 수 있지만, 대안을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른 치료법을 검증하기 위해 직접 정신의학 책을 집어들고 뇌파나 약 효과를 연구할 방법 따위는 제게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일반인은 의사 한 사람의 실력을 의심할 수는 있어도, 현대 의학 전체를 의심할 수 없습니다.

의심은 좋은 일이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입니다. 귀납법을 튼튼한 추론방식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허술한 습관으로 격하시킨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세상에 물체가 정말 존재한다는 생각을 의심하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물체가 진짜라는 생각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때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넘어가야 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메트릭스인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길을 잘못 잡았습니다. 이 세상이 진짜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와중에도, 우리는 이 세상이 진짜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모든 추론은 증명 없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지점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의심도 추론하는 활동이라면, 모든 것을 의심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을 제약하는 한계입니다.

한계를 마주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철새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주장을 의심하고 검증할 수는 없으니, 우선은 권위 있는 주장을 잠정 결론으로 받아들입니다. 동시에, 전문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지켜보다가, 흐름이 바뀌면 신속하게 다른 주장으로 환승합니다. 자신보다 깊이 파고들어 간 사람을 신뢰하되, 맹신하지 않는 것. 이게 건전한 의심쟁이가 미지의 영역을 마주하는 법입니다. 기회주의자 같지만, 일상을 이어가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아는 척하는 고집쟁이가 되느니, 모른다고 인정하고 생각을 바꾸는 의심쟁이가 백만 배 더 낫습니다. 따라서, 저는 제 앞에 보이는 한계를 깰 수 있게 될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 케인즈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이 변할 때, 나도 마음을 바꾼다.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by 존 메이너드 케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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