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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Oct 03. 2021

도사 할아버지, 아리랑 할머니

전라도

 




할아버지


  


젊은 시절, 큰형들 학비를 벌기 위해 일본에 갔다. 말 목장에서 일해 목돈을 만든 후 사진관과 양복점에서 일하며 기술을 배웠다. 번 돈은 형들 대학 뒷바라지에 쓰였다. 대학 졸업 후, 이제 덕 보고 살 일만 남았다 생각했을 때 형들이 차례로 단명했다. 할아버지에게 남은 건 조카들뿐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남은 돈으로 땅을 샀다. 좋은 집들은 형수들 다 주고, 제일 작은 집에서 8형제를 낳고 살았다.


 기억에 할아버지는 도사 같았다.  ,  수염. 빳빳하게  먹인 두루마기를 입고 팔자걸음으로 휘적휘적 다니셨다. 가끔 구름을 타고 오신  우리 집도 다녀가셨다. 버스를 타고 전라도에서 경기도까지 오셔 새벽녘 인사도 없이 가셨다. 여행 좋아하시던 할아버지는 바람 같았다. 휘이 나타나셨다 휘익 사라지셨다. 직장 탓에 이사를 자주 다니는 막내아들을 핑계 삼아 전국을 이리 유랑하셨다.


할아버지는 몇 년간 작은 아빠의 오락실을 맡아주셨다. 꼬맹이들에게 동전 바꿔 주는 일이었다. 시간이  때면 가게 안쪽 방에서 붓글씨도 쓰셨다. 가끔 우리 남매에게 따라 써보라 하셨다. 나는 8살이고 동생은 5살이었다. 글씨에 자신 있던 나는     신경 써서 썼다. 누가 봐도  글씨가  멋진데, 할아버지는  남동생만 칭찬하셨다. 할머니는 내가 서운해할까 낚아채듯 등에 업고 동네 구경을 나가셨다. 할아버지 시선 끝엔  남동생이 있었다. 남동생을  때면  주름이  펴지도록 웃으셨다. 남동생을 너무나 사랑하셨는지 돌아가실 때조차 동생 잘되기를 주문 외듯 하셨다 한다.

 

할아버지는 오락실 동전 노래방에서 노래도 부르셨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할머니를 보시며 노래했다. 좁은 동전 노래방 부스 안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마이크를 잡으신 모습은 어린 내 눈에 요상스러워 보였다. 노래가 시작되면 할머니는 작은 의자에 앉아 손뼉 치며 박자를 맞추셨다. 아빠가 엄마에게 주는 사랑은 학습된 것이었나. 할아버지는 옛사람 같지 않게 자유롭고 로맨틱했다.




할머니


  


할머니는 호리호리한 몸에 허리가 곧았다. 엄마보다도 키가 컸다. 긴 흰머리를 참빗으로 빗어 비녀로 틀어 올렸다. 오랜 세월 타진 쪽진 가르마처럼 성격도 직설적이었다. 에두르는 법이 없었다. 행동은 어찌나 빠른지 마당 끝과 끝을 날 듯 다니셨다. 내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틀니를 빼고 쪼글 해진 입을 보여주셨다. 볼 때마다 깔깔 웃곤 했다. 웃는 나를 등에 업고 대숲으로 논으로 다니셨다.


할머니 애창곡은 아리랑이었다. 한 소절 부르면 내가 그대로 따라 했다. 얼추 부를 수 있게 되면 이 집 저 집 데리고 다니시며 노래를 시키셨다. 큰큰댁 마루에서, 작은할아버지 마당에서 타령을 했다. 내가 노래를 시작하면 할머니는 발끝을 가볍게 차며 빙글빙글 돌았다. 한 손은 치맛자락을 잡고 다른 손은 곱게 접혀 하늘로 팔랑 거렸다. 나는 신이 나 목청을 더 높였다. 밤에도 할머니 옆자리는 내 차지였다. 누워서 할머니 젖을 만지면 바람 빠진 거 뭐 좋다 만지냐 하시며 등을 쓸어 주셨다. “할머니 좋아서 그러지요~” 하면 아비 닮아 이쁘게 말한다며 꼬옥 안아 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할머니 냄새가 좋아 코를 비벼 댔다.


할머니 이름은 신식 이름이여~ 다른 할매들이랑 다르고 말고~ 아부지가 배우신 분이라 요런 이름을 지어줬당께~”

할머니 아버지는 소학교 선생님이셨다. 여자는 학교 문턱도  오르던 시절. 할머니는 아버지 덕을  늦은 입학을 했다.

“동네서 글 아는 아낙은 나뿐이고 말고~"

2 남짓한 학교생활은 할머니 평생의 자부심이 되었다. 시간이 나면 지나간 달력을 작게 오린 다음 그곳에 히라가나와 한글을 연습했다. 먼저 8형제 이름을 또박또박 썼다.  쓰고 나면  할아버지에게 글씨 자랑을 했다. 할머니 볼에 부끄러움이 스쳤다. 할아버지 쓰는 한자는 어려워   익혔으니 우리 막둥이는 학교 가서 익히거라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멀미가 심하셨단다. 고모네 가는 버스에서 기절하셔서 종점을 2번을 지나 깨곤 했다. 여행 좋아하는 할아버지는 끝끝내 아쉬워하시며 “벅수 벅수(답답한 사람)” 하셨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할아버지와 멀미를 하는 할머니를 닮았다. 엘리베이터만 타도 울렁거리는 전정기관을 가지고서 여행을 끊지 못하는 걸 보니 유전자 싸움에서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진 건가 싶다.




 

큰엄마  
 
 

어린 나이에 장남에게 시집왔다. 시집오고 나니 막내 도련님은(아빠) 3살이었다. 이듬해 아들을 낳았고 농사일로 바쁜 할머니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시어머니는 섬세한 분이 아니었다. 불같이 화를 내다 물같이 차가워졌다. 농사일하는 장정들 세끼 밥해 먹이고 새참을 날랐다. 깔끔한 시아버지는 하루 입고 옷을 내놨다. 개울에서 빨래를   먹이는 데만 반나절이 갔다. 불평할  없었던 새댁은 시아버지 들으란  밤만 되면 방망이질을 해댔다.  
  막내 도련님은 그중 살가웠다. 차가워진 큰엄마 손을  불어 잡아 주기도 하고 아궁이  때는 것도 도왔다. 아들같이 키웠던 도련님은 군인이 되어 시골집을 떠났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길을 4  아들이 따라나섰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장손은 큰엄마의 자랑거리다. 아직도  공을 아빠에게 돌리며 고마워하신다.  


도련님은 결혼해 첫아이를(나) 건너 마을에서 낳았다. 그 당시 몸조리는 1년에 한 명만 해야 한다는 미신이 있었다. 동서 친정은 작은 며느리 몸조리를 막 끝낸 참이었다. 때문에 동서는 친정 대신 할머니 집에 와있게 되었다.


세련된 도시 이미지였던 엄마를 큰엄마는 조금 불편해하셨단다. 시골집에서 불편할까 밥은 입에 맞을까 걱정이 많았지만 큰집에서 한 달을 지내며 털털한 엄마와 큰엄마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이른둥이였던 날 마을 사람들이 못난이 못난이 놀릴 때도 엄마보다 더 불끈하시며 싸워 주셨다.  
 

“나 아기 때 예뻤어요?” 나중에 여쭈니  

“이삐진 않았지~ 황달인가 거시기가 있어 노~래 가지고 감자맨키로 생겼드만~ 딴사람들이 뭐라 하니 빽 화내뿟지. 못난이 말이 영 틀린 건 아녔고말고~” 큰엄마의 호탕한 웃음에 내 어릴 적 감자 얼굴이 스쳐 반박할 수가 없다. 시무룩한 내 모습에 큰엄마는 웃음보가 터지고 만다.

"귄 있었지~ 눈이 초롱 한 게~ 귀여운 건 우리 애기 따라올수가 없지~ 안그냐~"

큰엄마 웃음소리에 내 기분은 금방 풀리고 만다.

이제야 생각하니 내가 받은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마 아빠를 향한 사랑이었나 보다. 내가 예뻐 받았다 생각했던 사랑은 이렇게 늘 뒷이야기가 있다.  


큰엄마는 100세 가까이 장수하신 할아버지를 모시고 60년을 살았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 치매간호도 여러 해 해내셨다. 고단했을 큰엄마의 시간을 난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사람들로 북적였던 4 칸집은 이제 텅 비었다. 엄마는 친정엄마 생각하듯 큰엄마를 살뜰히 챙기신다. 때마다 내복과 옷을 보낸다. 나 또한 첫 월급 받은 날 큰엄마께 빨간 내복을 선물했다. 1년에 몇 번 뿐이지만 전화를 드리고 2년 전에는 큰집을 찾아 아이들도 보여드렸다. 똑같은 걸 낳아왔다며 큰아이를 보고 웃으시던 큰엄마를 기억한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살았어도 인생은 각기 흐른다. 내가 아는 이야기는 아주 일부일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연과 사람들이 시골집을 스쳐갔을 것이다. 어른들이 대단치 않았다 여겼던 이야기들은 내게 무척이나 흥미로워서 수집하듯 머리에 기억했다. 책에만 있는 줄 알았던 역사는 내 기억의 사람들에게도 존재한다.  


집에 대해 글을 쓰며 예전 기억을 오랜만에 꺼내 보았다. 어제 일도 가물가물한 내가 예전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놀랐다. 기회가 되면 아이들에게도 큰집 이야기를 해줄 생각이다. 전래동화를 듣는 기분일까? 아이들의 반응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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