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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Oct 04. 2021

유전이란 건


“이 꼴이 될 때까지 누가 술을 먹였어?”


한껏 꾸미고 간 약속 자리에 얼큰해진 내가 있다.  나는 억울하다. 한잔도 아닌 한 모금으로도 얼굴색이 바뀐다. 술이 한 모금 들어가면 눈썹 주변이 화끈해지기 시작한다. 두 잔째 들어가면 온몸이 붉어진다. 팔에 붉은 반점이 뜨고 배까지 벌게진다. 이쯤 되면 주변 사람들이 날 택시에 태운다. 더 놀고 싶은 나는 이번에도 강제로 컴백홈이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는데 그도 내겐 해당 없는 말이다. 빨개진 보람도 없다. 맥콜 한 캔으로도 심장이 귀 옆에서 파닥파닥 뛴다. 이렇게 뛰다가는 몸에서 심장이 탈출할 것 같다. 이런 상태에서 즐거운 술자리는 무리다.  




설날에 친가 식구가 모두 모였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술자리가 이어진다. 큰엄마는 내 손에 안주가 들린 쟁반을 들려주신다. 문을 열 손이 없어 쟁반을 마루에 내려놓는다. 미닫이 문을 여는 순간. 웃음이 터진다. 

술잔 앞에 벌게진 친척 어른들이 있다. 경쟁하듯 빨갛다. 이곳이라면 나도 평범하다. 터지는 웃음을 막으며 안주를 내려놓는다. 막내 고모 옆에 붙어 앉아 어른들 모습을 찬찬히 살펴본다. 그리고 유전에 대해 생각한다.




 미용사인 막내 고모 작품인 고모들은 헤어스타일이 똑같다. 할아버지 닮은 큰고모, 할머니 닮은 셋째 고모 모두 빠글빠글 파마를 얹고 있다. 컬 사이로 두피가 보이지 않는다. 네 명의 고모들 머리가 빽빽하다. 환갑을 훌쩍 넘는 할머니지만 탈모는 고모들을 피해 갔다. 틈 없이 촘촘한 머리칼을 참빗으로 빗어 내리던 할머니가 떠오른다. 아흔이 넘어서도 멋지게 넘겨져 있던 할아버지 머리칼이 생각난다.


친가의 피를 불려 받은 나도 머리숱이 많다. 단백질이 머리로만 갔는지 키는 안 크고 머리만 수북하다. 강아지 키우는 집도 아닌데 머리카락 모으는 테이프 돌돌이는 달에 2~3개는 기본이다. 머리 빗다 도끼빗 부러뜨리기는 예사고 묶고 간 머리끈이 터질 때가 많아 가방엔 늘 여분의 머리끈이 있다.  

이제 2학년이 된 딸아이에게도 이 유전자가 물려졌다. 꼼꼼히 묶어준 머리끈이 학교에서 ‘탕’ 하니 끊겨 나간다. 털갈이를 하듯 빠지기도 많이 빠지고 나기도 많이 난다. 깔끔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새로 난 머리가 잔디같이 빳빳이 서있다. 미안하면서도 웃음이 난다. 


나는 알코올 저항력, 멀미, 좁은 이마, 머리숱을 받았다. 그중 검증되지 않은 알코올 분해능력을 뺀 모두가 첫째에게로 갔다. 유전의 힘은 무섭다. 아이를 키워보니 더더욱 그렇다. 후천적으로 바뀌는 게 있나 싶게 핏줄이 많은 것을 지배한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피를 타고 아래로 흐른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시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장지에 도착해 모두 앉아있는데 남편이 희미하게 웃는다. 모이고 보니 나만 다르게 생겼다는 것이다. 시간 속에서 큰엄마 작은엄마도 비슷해졌는데 나만 너무 달라 튀어 보인다 했다. 얼마 전 동서가 들어왔다. 가족모임에서 이제야 그때 말을 이해한다.  


각자 물려받은 외모와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 가족이 된다. 다른 두 유전자가 한 아이에게서 섞이고, 남남이었던 부부도 시간에 따라 비슷해진다. 시간은 유전만 한 힘을 가지고 있다. 긴 시간은 달랐던 두 사람을 가족으로 만들어준다.


신비하다 핏줄이란 건.

신기하다. 함께한 시간이란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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