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토요일 오전. 오래된 시립도서관.
시험 준비하러 온 여중생은 열람실에 문제집만 가지런히 늘어놓고 도서실로 살금살금 내려간다. 쿰쿰한 책 냄새가 배인 책들을 손으로 훑으면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왔다. 숲 속 나무 사이를 산책하듯, 천장까지 높게 이어진 책장 사이를 걷는다. 걷다 보면 작은 창 사이로 바람이 든다. 책위에 쌓였던 먼지가 흩어진다. 서가를 가로질러 길게 뻗쳐 들어온 햇빛 길을 따라 먼지가 은하수처럼 흐른다. 다리도 닿지 않는 도서실의 높은 의자에 앉아 오르락내리락하는 먼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조각들을 향해 손을 뻗으면 고 작은 것들은 꿈처럼 사라락 사라져 버렸다. 허공을 저은 손은 민망하여 호주머니로 들어가고, 나는 의자에서 내려와 정처 없이 책 사이를 또 걸었다.
묵직한 고요함. 도서관은 우주 같았다. 열람실은 책들 때문인지 소리도 공기도 묘하게 달랐다. 겹겹이 쌓인 책 냄새를 맡으며 나는 우주로 입장했다. 소리도 시간도 멈춘 듯한 공간에서 나는 우주복을 입은 듯 둥실둥실 책장 사이를 걸었다. 귀밑 3센티 머리를 애써 귀 뒤에 꼽으며, 상상력으로 아우성치는 책들의 소리를 들었다.
편안했다. 대화 기술이 없는 내게 사람들을 대한다는 건 때론 피곤한 일이기도 했다. 도서관은 다른 이의 기분을 살피느라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됐다. 책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혼자여도 외롭지 않았다.
흥미로운 소설은 100m 달리기를 한 것처럼 숨을 가쁘게 했다.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눈도 머리도 가슴도 뜨거워졌다. 슬픈 소설은 꺼억 꺼억 소리가 날정도로 날 울게 했다. 한바탕 울고 나면 가슴이 시원했다. 가벼운 소설은 그 자체로의 매력이 있었다. 후루룩 읽고 나면 시간 또한 휘릭 지나가 있었다. 책과 함께면 지루하지 않았다.
딴짓만 잔뜩 하다 돌아갔는데도 집에 가면 엄마의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엄마의 공부 열심히 했냐는 물음에 어깨만 으쓱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대답은 안 했으니 거짓은 아니다. 깨끗한 문제집은 죄책감과 함께 책가방에 묻어두고 침대에 누워 오늘 읽었던 책에 대해 생각한다. 엄마는 모를 나의 우주에 비밀이 쌓인다.
15년도 더 지난 오늘 고요한 도서관으로 향한다. 공부할 책과 해야 할 일들이 있지만 나는 중학생 시절과 달라진 게 없다. 그 예전처럼 할 일들을 책상 한구석에 몰아두고 책장 사이를 걷는다. 표지만 쓱 구경하고, 꺼낸 책을 몇 장 휘리릭 넘겨도 본다. '오늘은 이 책을 읽었답니다.' 내놓기도 부끄러운 책 겉핥기를 하면서 나는 웃는다. 혼날 일 없는 어른 이건만, 딴짓하는 게 들킬세라 주위를 둘러보는 내가 우스워 웃는다.
세월 속에 도서관은 많이도 달라졌다. 증명사진으로 만들었던 자그마한 도서회원증 대신 모바일 회원증이 생긴다. 카드 목록함에 빼곡히 들어있던 종이 꾸러미에서 암호 같은 청구기호를 찾아 적어야 했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검색 한 번에 위치와 청구기호를 출력할 수 있다. 책 표지 뒤에 붙어있던 도서대여 종이도 사라졌다. 바코드 하나로 10권이 넘는 책을 한 번에 대여할 수도 반납할 수도 있다.
새로 지어진 도서관들은 밝다. 백화점처럼 지하주차장도 있다. 열람실도 달라졌다. 칸막이 독서실 책상은 유행 따라 사라지고 카페 같은 기다란 테이블이 생겼다. 개별로 조절할 수 있는 조명도 있고, 핸드폰이나 노트북을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도 자리마다 있다. 책장 색도 밝아졌다. 니스 칠로 반들반들하던 나무 책장 대신 희고 깨끗한 책장이 생겼다.
편리하고 좋아진 도서관에 앉아 먼지가 흐르던 도서관을 떠올려 본다.
나와 도서관 모두가 변했건만, 난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든다.
고요한 나의 우주. 내가 그리워하는 건 그때의 도서관일까, 그 시절의 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