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기가 걸리고 운동장에 동요가 흘러나온다. 청군이 된 나는 청색 천막 아래 앉아 시합 순서를 기다린다.
선생님 안내에 따라 우리 반은 5명씩 달리기 출발선에 선다. 총소리와 함께 달리기는 시작된다. 빠르게 지나가는 친구들을 보자니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드디어 우리 조 차례다. 아이들은 비장한 표정을 짓고 출발선에 선다. 나도 터져나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총소리를 기다린다.
탕! 비등했던 출발이건만 50미터가 지나기도 전에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온 힘을 다해 뛰는데 거리는 좁혀지긴 커녕 더 멀어지기만 한다. 멀리 보니 앞선 친구가 결승선을 넘는다. 박수받는 1등과 분한 2등의 표정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다. 잊혀진 레이스. 나의 달리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1등 2등 3등 친구들은 숫자가 적인 깃발 뒤에 앉는다. 1이 그려져 있는 동그란 도장이 친구 손목에서 빛이 난다. 허전한 손목을 문지르며 4~5등 친구들 사이로 터덜터덜 들어간다. 꼴찌들에게는 앉을 깃발조차 없다.
달리기. 내 운동회를 재미없게 만드는 잔인한 종목이여.
킥판 잡고 연습하던 발차기가 걷기였다면 자유형은 뛰는 것과 같다. 킥판을 놓고 달릴 준비를 하자니 걸음마 끝낸 아이처럼 가슴이 콩닥 거린다. 앞사람이 출발하면 나는 큰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 물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한다.
출발. 발을 크게 구르면 자유형이 시작된다.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힘이 단단히 들어간다. 다리를 열심히 차내며 물속을 달린다. 팔 돌리기와 함께면 물 가르는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팔을 돌리는 사이 고개를 돌려 숨도 쉴 수 있게 된다. 코로 내쉬고 입으로 들이쉬는 이상한 호흡법도 익숙해졌다. '코로 내뱉어야지' 다짐과 생각 없이도 물속으로 고개를 넣으면 코로 공기방울이 자연스레 나간다. 파! 하며 힘껏 들이키고 물속에서 작고 오래 내뱉는다.
레일 끝쪽 천장에 깃발이 달려있다. 예전 운동장에서 봤던 만국기 같다. 깃발이 보이면 멈출 준비를 한다. 킥판 없이 해냈다. 헉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재밌다. 아 너무 재밌다.”
입안에서 오랜만에 쇠맛이 느껴진다. 숨이 차고 팔다리도 아프다.
이렇게 힘든데 왜 재밌을까? 아니다. 애초에 운동이 재밌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뇌에 산소공급이 안 돼서 미치기라도 한 건가.
달리기가 느린 내게 바람을 가르며 뛰는 건 드문 일이다. 운전을 못하니 속도를 내어 드라이브하는 일도 없다. 다리로든 바퀴로든 땅 위에서 속시원히 달려 본일 없는 내가 물속에서 달린다. 통쾌하다.
실컷 달리고 레일 끝에서 숨을 몰아 쉰다. 그리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빨라진 속도가 느껴진다. 수영장 기둥이 휙휙 지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일 끝을 알리는 천장의 깃발이 보인다. 중간에 일어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수영한다. 벽이 손에 잡힌다. 완주다.
아 달린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느림보 거북이의 한을 물속에서 풀게 될 줄이야.
물밖로 나오자 머리부터 뜨거운 물이 흐른다. 팔다리를 열심히 휘저은 결과다. 땀을 흘리며 운동하는 대신 온몸의 열기를 수영장 물이 식혀준다. 뿌듯함이 몰려온다.
약속한 수업시간은 이미 끝이 났다. 샤워실로 돌아가며 레일을 돌아본다. 수영할 때는 멀어 보이던 레일이 서서 보니 만만해 보인다. 실력이 늘어 왕복으로 달리는 날 상상해 본다. 모터 달린 것처럼 쭉쭉 나가면 얼마나 더 신이 날까.
늦바람이 무섭다고 속도의 재미를 알고 나니 이 기쁨을 끊을 수가 없다. 더 빨라지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수영이 내 안의 본성을 깨우나 보다. 거칠게 달리는 수영장의 폭주족(?)이 되고프다.
물속에서 달리는 기분. 부디 그 마음을 잊지 말길 바라며.
휙휙 바다거북이를 꿈꾸는 느릿한 육지거북이의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