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지게 하는 것도. 가깝게 만드는 것도 모두 사람
오래전 친구에게 들었던 수영장 텃세 이야기.
학교도 직장도 아닌데 다 큰 어른들이 모여 하나를 따돌리는 일이 가당키나 하겠냐만은 수영장에는 엄연히 텃세가 존재했다.
시작은 스승의 날 선물 때문이었다. 강사님께 선물한다는 명목으로 자칭 회장이라는 분은 꽤 큰 액수를 요구했다. 친구는 고민하다 참가하지 않겠다 말했다. 표정이 좋지 않았던 회장님과의 대화 이후 따돌림은 시작됐다.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빠지니 수챗구멍을 치우라던가, 이건 내가 쓰는 사물함이니 짐을 당장 빼고 이 번호는 비우라던가 하는 일들. 말도 안 되는 지적이 수영복 품평을 거쳐 몸매에 이르렀을 때 친구는 수영을 그만뒀다. 기분 좋게 운동하려 갔다 만난 텃세는 매서웠다. 듣기만 해도 뻐근해지는 에피소드에 나도 수영장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코로나로 타격받은 곳이 한두 곳이겠느냐만은 수영장도 그중 하나였다. 물 마를 일 없던 수영장은 2년 가까이 문을 닫았다.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긴 시간 동안 텃세를 부렸던 회원들의 결속력이 약해졌다. 나는 안심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내 수영생활도 시작되었다.
9월이 되고 내가 다니던 수영장은 초등 생존수영으로 인해 아침수업이 없어졌다. 나는 회원들과 함께 수영장을 옮겨야 했다. 새로운 수영장에서 우리들은 중급반과 상급반으로 나눠 배정되었다.
나는 지인 한 명과 중급반으로 들어갔다. 기초부터 함께 했다던 회원들은 친밀도가 높아 보였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벽이 느껴졌다.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기존 회원들은 인사를 해도 잘 받아주지 않았다. 나를 사이에 두고 그들만의 대화도 이어졌다. 낄 수도 안 낄 수도 없는 대화에 나는 멎쩍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으나 유난히 찬바람이 부는 회원들 때문에 민망한 일이 잦았다. 투명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들어보니 상급반도 마찬가지였다. 뒤에 오던 회원이 속도를 높여 발목을 잡는다던가, 가깝게 턴을 해 부딪힐뻔한 일들이 생겼다.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있지 못하게 중간중간마다 기존회원이 줄을 서 대화를 차단하기도 했다고 한다.
월 초가 되면 탈의실에서 커피를 돌리는 신입회원들이 있었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저기서부터 문제였던 것인가.
어색한 두 달의 시간이 지나자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같이 물밥 먹던 사람들 사이에 연대감이 싹텄기 때문이다. 함께 허우적 대다 보면 민망함 혹은 뿌듯함으로 마냥 인상을 쓸 수는 없다. 게다가 10시 수업은 초등학생을 둔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시간이다. 같은 나이대와 아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이유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친해지게 되었다.
친해진 후 물으니 마음에 안 든 이유는 순서 때문이었다고 했다. 처음 왔는데 줄 끝에 서지도 않고 자기 앞에 서있었던 게 이유였다.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괘씸한 마음이 들어 밉게 봤다고 했다.
수영 7개월 차. 이제 어느 정도 그들을 이해하게 됐다. 실력별로 서야 중간에 기다리거나 막히지 않고 운동할 수 있다. 미리 알려주면 좋았을걸.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물속에 들어온 순서대로 섰던 것이다.
텃세를 옹호하려는 건 아니다. 겪어 봐서인지 쑥스러움을 장착하고 들어오는 신입회원들에게는 더 크게 인사하며 지낸다. 투명인간 취급 대신 대화를 건네고 너무 뒤처진다 싶으면 "먼저 가도 될까요?" 넌지시 묻기도 한다. 대부분 밝게 수긍한다. 이러면 될 일을. 2달간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를 했나 아쉽기만 하다.
텃세 때문일까. 오히려 같이 수영장을 옮긴 회원들끼리는 결속력이 강해졌다. 오늘은 호흡이 어려웠느니 팔이 안 돌아가느니 하는 고민은 지인들과 나누기 힘든 주제이다. 수영이 끝난 후 마르지 않은 머리로 커피숍에 둘러앉아 수업이야기를 하다 보면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샤워실에서 만났기에 맨얼굴이 부끄러울 일도 없다. 꾸미지 않은 모습 따라 마음을 꾸며 만들 일도 없다. 희한한 인연이다.
울산에서 이사와 외로웠던 내 생활도 달라졌다. 이웃이 생기니 내 생활도 활기가 넘친다.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던 나였는데 나이대 생김새 성격 모두가 다른 이들과 취미 하나로 쉽게 친해졌다.
너무 귀찮아 집에서 쉬고 싶은 날. 단톡방 언니들 닦달에 운동을 가게 된다. 게으름뱅이였던 내가 주 3회였던 운동을 5회로 늘린 것도 순전히 언니들 덕분이다.
접영이 안된다 투정하면 잠수해서 물속 자세를 봐주기도 하고 호흡 노하우도 풀어내준다. 덕분에 실력이 안 늘어 지겨웠던 수영 권태기도 가뿐히 견뎌낼 수 있었다. 공통점이라고는 수영뿐인데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오늘도 수영장 탈의실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아이들 학원도 추천받고 치과도 소개받는다. 동네마트 세일소식은 전단지보다 언니들이 더 빠르다. 드라이기 기계에 100원을 넣어주며 찡긋 선심 써주는 언니 덕분에 힘든 수영의 마무리가 즐겁다.
멀어지게 하는 것도 가깝게 만드는 것도 모두 사람인가 싶다.
나는 타인에게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결정은 온전히 내 몫이다.
슬슬 고인 물이 돼 가는 지금. 멋쩍었던 예전의 나를 돌아보며 글을 마친다. 내 작은 친절이 누군가에게는 운동의 원동력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