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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Oct 25. 2021

휠체어 타고 온 전학생

경상남도 진해시


두 번째 학교는 휠체어를 탄 채 시작됐다.

아이들은 내 휠체어를 신기해했다. 밀어봐도 되냐고 줄을 섰던 이 물건은 얼마간 주목을 받았다. 으쓱함도 잠시뿐.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의 흥미는 금세 식었다. 안경 쓴 아이에게 쏟아지는 반짝이는 관심처럼 바퀴 달린 내 의자는 더 이상 신기한 물건이 아니게 되었다.

 

휠체어가 들어가기엔 학교 책상이 너무 낮았다. 엄마는 의자에 나를 들어 앉혔다. 엄마의 "끙"하는 소리가 죄책감이 되어 마음에 쌓였다. 엄마는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시곤 집으로 향했다. 휠체어는 교실 뒤편에 접힌 채 종례시간까지 주인을 착실히 기다려주었다. 마치 철갑옷을 입은 기사 같았다. 성안에 갇힌 나를 말없이 지켰다. 그가 외롭지 않게 쉬는 시간마다 뒤를 돌아 안부를 확인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손길 없인 어디도 갈 수 없었다. 뿌리내린 나무처럼 우리는 그저. 거기. 있었다.


가을이 지나고 있었다. 단풍이 낙엽이 될 때쯤 내게 목발이 생겼다. 이동의 자유가 생긴 나는 옆 분단 친구와 오가며 놀았다. 내 기분은 갈수록 좋아지고, 조각난 뼈들도 느리지만 성실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내 두 번째 선생님은 매정한 할머니였다. 일기에 마녀로 표현된 이 선생님은 아픈 아이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나는 눈치를 보느라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화장실을 갈 수 없었다. 도와주겠다 약속했던 선생님은 늘 그 약속을 잊었다.

 어느 날엔가 선생님은 고함을 치며 내 일기장을 바닥으로 던졌다. 나는 목발을 짚고 일기장을 주으러 가다 반 친구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보기 좋게 넘어졌다. 교탁은 하늘보다 높아 보였고 선생님의 차가운 눈빛은 가슴에 박혔다. 일기를 쓰지도 않고 뻔뻔히 제출한 것이 나의 죄였다. 나는 넘어진 채 일기장을 넘겨 보았다. 그날 내가 쓴 일기는 밥풀이 묻었는지 뒷장과 꾹 붙은 채였다. 너무 억울해 눈물이 났지만 선생님이 무서워 참았다. 억울함보다 일기장을 든 채 목발을 짚고 자리로 돌아가는 걱정이 더 컸다. 자리로 돌아온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내려보던 선생님의 안경안 눈빛과 등으로 쏟아지는 친구들의 시선에 델 것 같은 기분만이 희미하게 날뿐이다.



나는 겨울이 오기 전 깁스를 풀었다. 요란한 소리가 나는 톱으로 깁스를 자르는데 다리까지 잘릴 것 같아 벌벌 떨었다. 반년 만에 보는 내 다리는 사뭇 이상해져 있었다. 더운 여름을 두꺼운 석고 안에서 보냈던 다리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며칠을 사라지지 않는 냄새와 씨름했다. 나는 다리가 썩은 게 아니냐 물으며 웃었다. 엄마는 대답 대신 핀잔을 주었다. 냄새가 사라지자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원숭이가 된 것 마냥 털이 길죽히 자라 있었다. 그리고 왼쪽 다리에 비해 지나치게 얇았다. 깁스를 풀면 당장 뛸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어린 내가 봐도 이상태로는 걷기도 힘들어 보였다.

 며칠 후 치수를 재었던 보조 장치를 받았다. 겨드랑이 아팠던 목발을 안 해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이 났다. 재활치료를 받았었던가. 기억나지 않는 내 1학년의 겨울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봄이 왔다.






진해의 봄은 퍽으로 아름답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밤에는 조명을 달은 벚꽃 나무가 더욱 빛이 났다. 일반인이 통제되는 부대 안에서 벚꽃을 원 없이 즐겼다. 보조장치까지 뗀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다리를 딛고 걸었다. 엄마는 백화점 아동복 코너에서 제일 비싸다는 원피스를 사주었다.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치마를 입고 벚꽃처럼 살랑이며 걸었다. 빗방울수보다 많을 것 같은 꽃비를 맞으며 걷고 또 걸었다.

 봄과 함께 나는 사고의 기억과 트라우마를 묻었다. 망각. 아이에게 주어진 무서운 회복력으로. 내 삶에 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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