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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Mar 07. 2022

강원도 산골 다람쥐 선생님

강원도 철원군

나는 강원도 철원군 작은 초등학교에서 저학년을 보냈다. 여름 때면 불어난 강물에 떠내려오는 지뢰가 있어 학교에서 지뢰 교육도 받는 곳이었다. 소풍은 북한군이 파고 내려왔다는 1땅굴로 갔다. 운동회 때는 군용차를  높은 아저씨가 오셔서 마이크 앞에서 축사를 해주셨다. 부모님 직업 조사 때면  10  9명은 군인가족인 학교. 달에  명은 이사를 갔고  명은 이사를 왔다. 아무도 전학을 신기해하지 않았다. 나도 그들   명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선생님을 만났다. 어른들 하시는 말로는 노처녀라는데 지금 내 나이쯤 되셨나 보다. 나는 여자는 공주 같아야 한다 생각했던 10살 소녀였다. 그런 내게 선생님은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셨다. 걸을 때마다 펄럭이는 바지가 치마보다 멋졌다. 정돈되지 않은 짧은 머리에서 풀냄새가 날 것 같았다.


어느 날. 운동장에서 조회시간이 있었다. 양팔 간격으로 서있던 아이들 사이로 다람쥐가 나타났다. 다람쥐는 호다닥 뛰다 내 옆자리에서 열심히 옆구리를 정돈했다.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추임새처럼 삐~거리는 마이크 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다람쥐만 쳐다보았다. 딴 눈 파는 건 눈만이 아니었다. 다람쥐에게 들키지 않고 가까이 가까이 가려던 나는 기어코 간격을 이탈했다. 체육부장 선생님께서 눈을 도깨비처럼 뜨고 죽비를 흔드셨다. 그때 선생님께서 가만히 다가오셔서 나를 줄 사이로 넣어 주셨다. 혼날 걸 예상하고 눈물이 차오르려던 차. 벌로 다람쥐에 관한 시를 써오라 하셨다.

그날 하루가 온통 다람쥐였다. 다음날 시도 쓰고 가사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짧은 산문도 써갔었던 듯싶다. 벌이 너무 재밌었다는 내 말에 선생님께서는 큰소리로 웃으셨다.


선생님은 글을 쓰는 작가였다. 한 학년당 한 반뿐인 작은 학교에 문예부도 만드셨다. 나는 주저 없이 방과 후 활동으로 문예반을 택했다. 수업은 매번 달랐다. 음악을 듣고 느끼는 감정을 글로 썼다. 첫 문장이 주어지면 그 뒷이야기를 붙여갔다. 학교가 너무 재미있었다. 선생님은 일기도 매일 숙제로 내주셨다. 숙제를 해가면 일기 끝에 볼펜으로 몇 마디씩 적어 주셨다. 그 글씨와 글귀가 너무 소중했다. 일기로는 아쉬워 가끔 편지를 써 껴 두곤 했다. 며칠 뒤 선생님은 답장을 주셨다. 침대 머리맡에 두고 며칠을 읽었다. 학예회 때 쓸 연극 대본도 문예부가 함께했다. 내가 참여한 극이 무대에 오르는 걸 벅차게 바라봤다. 상상이 글로 변하는 기쁨을 처음 느꼈다.


선생님은 학교 뒤 관사에 계셨다. 학교 끝나고 선생님 집 앞 넓적한 돌에 앉아 꽃을 구경했다. 나란히 앉아 선생님과 들었던 풀벌레 소리와 꽃향기는 내 평생의 낭만이 되었다.


학교 앞 도로에 훈련 탱크가 지나다니는 삭막한 동네였다. 아파트 베란다마다 군복이 걸려있는 전방에서 선생님은 내 꿈 이자 봄이었다.


고등학생 때쯤 은사님 찾아주는 사이트가 생겨서 선생님과 잠깐 연락이 닿았다. 목소리가 낯설었다. 결혼하셔 강원도 삼척에 있다 하셨다. 13살 때 보냈던 내 편지를 아직 가지고 계신다 하셨다. 가끔 아이들에게 내 편지를 읽어 주셨다고도 했다. 작은 어선이 모여 있는 포구에서 바다를 보고 계실 선생님이 떠올랐다. 내 편지를 읽어 주셨다던 삼척의 어느 초등학교도 상상했다. 기억해 줘 고맙다고 하셨다. 기억해 주셔 고마운 건 나였다.


동화작가가 되고 싶다는 건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께서는 할머니가 되어도 눈에 자유로움을 담고 살아가실 것 같다. 아직도 아이들에게 아름다움을 가르치고 계실까?


내 안의 나를 알아 봐주었던 첫 어른이었다. 나는 선생님께 이해받았고 사랑받았다. 주고받았던 많은 편지들이 아직도 내게 영향을 주고 있다.


내 아이들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길 바란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존재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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