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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Mar 05. 2022

마음이 펴지는 학교

강원도 철원군


푸르른 바다를 등지고 북쪽으로 이사를 간다. 잠에서 깰 때마다 지명은 쉬지 않고 바뀐다. 어느샌가 까만 아스팔트 길이 끝난다. 비포장 도로를 낡은 차가 요동을 치며 달린다. 차창밖 한두 개씩 늘어나던 산은 이제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풍경을 삼킨다. 산 뒤에 산이고, 산 옆은 산이다. 비에 젖은 초록은 눈부시게 선명하다. 산처럼 푸릇한 봄날의 논을 지나자 드디어 우리가 살게 될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강원도 철원


벚꽃이 날리던 진해와는 공기부터 다르다. 빽빽한 나무들은 아직도 찬기운을 뿜으며 서있다. 봄의 끝자락. 남은 추위를 쫓아내려는 듯 봄비가 세차다


비가 오는 학교 운동장에 웅덩이가 여러 개다. 중고로 구입한 오래된 차는 웅덩이를 지날 때마다 갸우뚱갸우뚱 몸을 흔든다. 요란하던 차체가 균형을 잡자 조용한 학교에 엔진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낯선 소리에 창문에 하나둘 구경꾼들이 고개를 내민다. 단출한 2층 건물. 아빠의 손을 잡고 교무실로 들어간다. 교무실 미닫이 문 옆에도 전학생을 향한 호기심이 가득이다. 문에 달린 눈들을 애써 무시하며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형식적인 반배정을 받는다. 한 학년당 한 반뿐인 작은 학교. 내 3번째 학교 생활이 시작될 참이다. 이곳 친구들은 내 휠체어를 못 봤다. 1년 전 사고는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나는 평범한 학생들 무리로 들어간다.


어쩌면 새로 시작한다는 건 꽤 좋은 일일지도 몰라.



작은 건물에 비해 학교터는 꽤 컸다. 모두 하교한 밤이 되면 운동장을 뛰어다닌다는 이순신 동상과 들고 있던 책을 큰소리로 읽는다는 여자아이 동상 사이에 작은 과실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가을이면 산에서 날아온 낙엽과 과실나무 잎이 모여 바닥에 색색의 카펫이 깔렸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드디어 운동장이 나왔다. 이른 아침 운동장 입구에는 책가방이 줄을 서있었다. 우리는 더운 여름과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한 매일. 등교와 동시에 운동장을 2바퀴씩 돌아야 했다. 선생님 눈은 매와 같았다. 요령 피우는 날은  바퀴를  돌아야 했다. 키가 작은 1학년은  종종거리며 달렸고, 고학년들은 길어진 다리와 길러진 체력으로 운동장을 성큼성큼 돌았다. 나는 짝짝이 다리로 겨우 운동장을 뛰었다. 절뚝거리는  옆에서 "운동장 보지 말고  멀리  보고 뛰어. 그럼  힘들어"라고 말해준 여자아이는  나의 단짝이  것이다.


책가방도 버거웠던 나는 학교를 다니며 30센티가 자랐다. 산속 학교에서 다림질된  마음처럼, 사고로 굽은 다리는 구김 없이 펴져갔다. 그리고 단짝 친구도 생겼다. 병동에서 만나는 어른 친구 말고  또래의  친구. 평생 기억될 좋은 선생님도 만났다. 선생님을 통해 책을 보았고 글을 만났다.

흔한 보습학원 하나 없는 이곳에서 나는 친구들과 다리가 찢어져라 고무줄놀이를 하며 행복했다.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 물으면 나는 대답을 찾지 못한다. 부모님 고향이자 친척분들이 계시는 전라도가 고향일 수도 있겠고, 중고등학교를 보낸 경기도 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중 한 곳을 꼽으라 한다면 나는 철원을 고르겠다. ‘자연'하면 나는 아직도 바다보다는 산이다. 울창한 숲과 들. 심심해 보이던 자연에는 여백이 있었다. 나는 철원의 여백을 사랑했다. 건물과 건물로 막혀 있는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자연의 빈 공간은 어린아이의 상상력으로 채워졌다. 이곳에서 마음껏 읽고 힘껏 쓰며 행복했다. 생각이 자랄 무렵 함께 했던 그곳의 풍경이 그립다. 조회시간이면 다람쥐들이 아이들 사이를 오갔던 마음속의 고향. 내 학교가 있는 철원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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