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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Oct 06. 2021

뱃속의 기억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다.  




나는 자그만 방안에 있다. 기다란 도형들이 하늘에서 벽에서 튀어나온다. 피하려 애쓴다. 풍선 안인 듯. 깊은 바닷속인 듯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공기가 무겁다. 몸을 짓누른다. 나가고 싶다. 눈이 먼 것처럼 어두워졌다가 눈이 멀 것 같이 환해진다. 잠깐 정신이 든다. 어지럽다. 어린 나는 엄마 등에 업혀 소리 지르고 있다. 살려 달라 소리치는 내 목소리가 낯설다. 다시 꿈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는 어릴 때 꿈을 꾸었다. 열에 한 번은 지독한 악몽이었다. 꿈을 꾸면 들어 본 적도 없을 말을 했다 한다. 온 방을 기어 다니며 잘못했다고 손발을 싹싹 빈다. 제발 살려 달라 애원한다. 아이의 울음이라 기엔 너무나 고통스럽다. 찢어질 듯 운다. 당황한 엄마는 나를 달래려 갖은 방법을 써본다.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다.

다음날 잠에서 깨면 전날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병원에 데려가 본들 야경증 이란 말 뿐이다. 한 달에 두어 번. 시작하면 한 시간은 예사였다.


유치원 수련회를 간 날. 그날도 꿈을 꾸었다. 당황한 선생님들은 밤중에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와 아빠가 수련회장으로 출발한다. 자지러지는 날 데리고 집으로 간다. 나는 잠들고 차 안은 적막이 흐른다. 태어나서 이제껏 사랑으로 키웠던 딸이었다. 엄마 아빠가 모르게 생긴 나쁜 일 따위는 없었다.


이해되지 않는 이 나쁜 꿈은 유치원 때 극에 달했다가 초등학교에 가며 횟수가 줄었다. 그리고 중학교 때 끝이 났다. 마지막 꿈은 기억이 난다. 꿈속에서 익숙한 분위기를 느꼈다. 장면은 다르지만 분위기로 직감했다. 꿈꾸는 중에도 꿈인 줄 알 수 있었다.

‘또 이거야? 오랜만이네.’  그날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한참 후. 우연히 나 태어났던 날의 이야기를 들었다. 직업 군인이었던 아빠는 출산 전 3달간의 장기훈련을 떠났다. 강원도에 혼자 남겨진 엄마는 친정으로 가기로 한다. 예정일은 한 달이 남았다. 만삭의 몸으로 고속버스에 오른다. 지금처럼 교통상황이 좋지 못했다. 좁은 버스 좌석에 앉아 10시간을 이동해야 했다.

여수에 도착한 다음날. 엄마는 하혈하기 시작했다. 작은 외삼촌은 동네 제일 크다는 산부인과에 엄마를 태우고 달렸다. 아이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했다. 진단에 필요한 초음파기계와 인큐베이터가 병원에 없었다. 바로 전원이 결정되었다. 엠블란스가 사이렌을 울리며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큰 병원으로 갔을 땐 상황은 더 심각해져 있었다. 바로 수술에 들어가야 했다. 보호자 사인이 필요했다. 아빠는 훈련으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외삼촌은 외가라 사인 자격이 없다 했다. 작은 외삼촌은 분노했다. 막냇동생 죽게 생겼다는 말을 듣고 큰외삼촌이 큰아빠 동네로 출발한다. 수줍어 목소리 들은 사람이 몇 없었던 큰외삼촌은 남의 동네에서 소리소리를 지르며 큰아빠를 찾았다. 밭에 있던 큰아빠는 영문도 모른 채 흙 묻은 장화를 신고 병원에 끌려왔다.

시가 쪽 사인과 동시에 엄마는 수술대에 올랐다. 전치태반이었다. 아이는 물론이고 산모가 살 확률도 낮다 했다. 아기 심장 소리는 끊어졌다 가늘게 이어졌다 반복했다. 큰외삼촌은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수술장 앞에 서 계셨다. 작은 외삼촌은 융통성 없는 병원이라며 허공에 대고 소리를 쳤다. 1년 만에 본 제수씨는 피투성이였다. 큰아빠는 어찌할 바를 모르셨다.

엄마는 홀로 수술장에서 싸우셨고. 기적적으로 우리 두 모녀는 살았다.

아기는 2.1kg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서 자랐다. 엄마는 보름 만에 날 안아 보셨고. 아빠는 두 달 만에 날 만났다.  




이야기를 들으며 갑자기 꿈이 떠올랐다. 유년시절 날 괴롭혔던 그 꿈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걸까. 살고 싶어 했던 걸까. 이것이 아니면 내 악몽을 설명할 길이 없다. 태아에게도 기억이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엄마 뱃속부터 겁쟁이였던 나는 구해주려는 줄도 모르고 뱃속에서 그리 울었나 보다.  


어렵게 태어난 난 돌잔치 때 실을 잡았다. 큰아빠는 박수를 쳤다. 전화로 돌잡이 소식을 들은 외갓집 식구들은 구수한 사투리로 칭찬을 해 주셨다. 내 생명에 지분이 있던 친척 어른들은 내가 자라는 내 넘치는 사랑을 주셨다.  


악몽을 꾸지 않은 지 20년이다. 무의식을 극복한 건 세월인가 싶다. 나는 사랑으로 단단해졌다. 그리고 시간으로 공포를 이겨냈다.  


내 인생은 감사한 일이 많은 채로 시작되었다. 조선시대였으면 죽었을 날 살려준 현대의학에 감사한다. 씩씩하게 날 지켜준 엄마도. 날 위해 소리쳐준 외삼촌도. 밭에서 달려와준 큰아빠에게도 빚을 졌다.

앞으로 힘든 일이 생길 때 태어나던 날을 떠올려 봐야겠다. 그리고 귀하게 얻은 인생. 실처럼 길~게 오래오래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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